아도서숙(영주 무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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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서숙
Adoseosuk Village Study Hall
대표명칭 아도서숙
영문명칭 Adoseosuk Village Study Hall
한자 亞島書塾



해설문

국문

아도서숙은 일제 강점기에 무섬마을 주민들이 계몽 활동과 항일 운동을 벌인 근거지였다. ‘아도’는 아세아 조선의 섬인 수도리를 뜻하며 ‘서숙’은 서당을 의미한다. 1928년 10월, 이 지역 항일운동 지도자인 김화진 선생의 주도로 무섬마을 청년들이 대중의 모임 장소인 공회당을 세우고 모임·배움·단결을 기치로 아도서숙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아도서숙은 당시 사회 분위기가 봉건적·억압적이었지만 파격적으로 열린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분 계급과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배울 수 있었고, 학급 편성은 오전·오후·야간반을 두어 학생들이 가능한 시간에 와서 배우고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하였다. 주로 민족 교육과 문맹 퇴치 및 신문명 교육, 농사 기술 교육 등을 실시했으며, 새끼를 꼬거나 멍석을 만들면서도 수업에 참여해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학생들의 단결심 고양과 체력 향상을 위해 강변 백사장에서 축구 같은 운동도 자주 즐기도록 했다.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겨울철에는 제한 없이 학생을 수용하였다.

아도서숙은 9명의 운영위원회를 두고 이 같은 교육 체제를 유지했다. 운영위원이었던 김화진, 김종진, 김성규, 김종규, 김계진, 김명진, 김광진, 김희규, 박찬하 등은 모두 영주 지역 사회운동의 핵심 인물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수시로 체포되어 구류·투옥과 고문을 당하였다. 또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격문 의거가 있을 때에는 무섬마을의 부녀자들이 아도서숙의 호롱불 밑에서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1931년 9월에는 일경 1개 소대가 몰려와 무섬마을 청년 18명을 체포하여 굴비처럼 한 오랏줄에 엮어 외나무다리를 건너 압송하기도 했다. 온갖 탄압에도 무섬마을 주민들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1933년 7월, 아도서숙에 불을 질러 5년 만에 강제로 폐쇄하였다.

아도서숙은 이 지역 항일운동의 특징적 역사를 잘 말해 주는 뜻깊은 장소이다. 현재 건물은 원래 자리에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영문

Adoseosuk Village Study Hall

This village study hall was built in 1928 by the local youth to be used as a village public hall and an educational facility. Under the motto “gather, learn, unite,” the hall became the local center of enlightenment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 rule (1910-1945). In 1933, the original building was burned down by the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and was only rebuilt in 2014. The name Adoseosuk literally means "study hall of the Asian island," referring to the village (its name Museom meaning "the island that floats on water") and its broader geopolitical context.

Despite the social oppression and educational segregation at the time, Adoseosuk promoted radically open education, welcoming people of all social ranks and ages. Students were offered to attend morning, afternoon, or evening classes where they could learn and participate in a free discussion. The curriculum focused on civil education, eradication of illiteracy, Western-style culture, agricultural technology, etc. The students were encouraged to exercise and play various sports like football at the local beach as a way to improve their physical fitness.

The curriculum of the study hall was managed by the school committee, which consisted of nine young men. They were also the key figures in the anti-Japanese movement in the Yeongju area. People from the village also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and even spent the nights here making Korean national flags. Although the committee members and the villagers were often captured, imprisoned, and tortured by the Japanese colonial police, they continued on with their struggle which led to the forced shutdown and arson of the hall by the colonial authorities.

Adodeoduk Village Study Hall is considered a symbol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Museom Village. Following the liberation of Korea in 1945, five of the nine committee members received the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and Museom Village became known as the village that produced the largest number of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in the country.

영문 해설 내용

아도서숙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무섬마을 청년들이 세운 공회당이자 주민교육기관이다. 모임·배움·단결을 기치로, 지역 주민들의 계몽 활동과 항일운동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원래의 건물은 1933년 일제가 불을 질러 없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2014년에 다시 지었다. ‘아도’는 ‘아세아 조선반도의 수도리’, 즉 무섬마을을 뜻하며, ‘서숙’은 서당을 의미한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억압적이었지만, 아도서숙은 파격적으로 열린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분 계급과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 배울 수 있었고, 오전·오후·야간반을 두어 학생들이 가능한 시간에 와서 배우고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하였다. 주로 민족 교육과 문맹 퇴치 및 신문명 교육, 농사 기술 교육 등을 실시했다. 또 학생들의 단결심을 높이고 체력을 향상하기 위해 강변 백사장에서 축구 같은 운동도 자주 즐기도록 했다.

이러한 체제는 마을 청년 9명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들은 영주 지역 사회운동과 항일운동의 핵심 인물들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 역시 이들과 함께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아도서숙에서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운영위원들과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거나 고문을 당하였으나, 온갖 탄압에도 마을 주민들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가 아도서숙에 불을 질러 강제로 폐쇄하였다.

아도서숙은 무섬마을의 항일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뜻깊은 곳이다. 광복 이후, 운영위원 9명 중 5명이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무섬마을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이 되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