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흑산도 사촌서당
신안 흑산도 사촌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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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신안 흑산도 사촌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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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安 黑山島 沙村書堂 |
주소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사리 213외1필지 |
지정(등록) 종목 | 남도 미래유산 |
해설문
국문
종합
사촌서당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손암 정약전(巽菴 丁若銓)이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에 섬의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다. 사리 마을은 모래가 많다고 해서 부르던 이름으로, 조선시대에는 사촌이라 하였다.
정약전은 순조 1년(1801) 신유사옥(신유년에 있었던 가톨릭교 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완도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자신이 머물던 사리 마을에 사촌서실을 만들었고, 동생인 정약용에게 「사촌서실기」를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 수록된 「사촌서실기」는 서당을 만든 형을 위해 1807년에 지은 글이다.
사촌서당에서 정약전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산어보』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하였다. 특히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서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대둔도 청년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흑산도 근해의 바닷속 해양생물을 55개 항목으로 정리한 책이다.
현재의 사촌서당 건물은 1998년에 복원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목조 초가이며,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를 가져와서 재구성한 것이다.
사촌서당 아래에는 1959년에 세운 사리공소가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정약전, 최익현 등 신안의 먼 섬으로 유배 온 사람들을 알리고 유배 체험 등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유배문화공원이 있다. 또한 마을 곳곳에는 섬 지역의 특징인 돌담장이 축조 당시의 모습대로 잘 유지되어 있어 2006년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개별
사촌서당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손암 정약전(巽菴 丁若銓)이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에 섬의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다. 사리 마을은 모래가 많다고 해서 부르던 이름으로, 조선시대에는 사촌이라 하였다.
정약전은 순조 1년(1801) 신유사옥(신유년에 있었던 가톨릭교 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완도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되어 머물면서, 사리 마을에 사촌서실을 만들었다. 이에 관해 동생인 정약용이 「사촌서실기」를 지었는데 이는 『다산시문집』에 남아 있다.
정약전은 사촌서실에서 글과 역사를 가르치며, 여러 저술 활동을 하였다. 특히 대둔도 청년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순조 14년(1814)에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서적인 『자산어보』를 집필했다.
현재의 사촌서당은 1998년에 복원된 것이며, 안채와 사랑채, 부속사, 사주문 등으로 구성되었다. 사촌서당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를 가져와서 재구성한 것이다.
영문
종합
개별
영문 해설 내용
종합
사촌서당은 조선 후기 학자인 정약전(1758-1816)이 섬의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다. 서당이 위치한 사리는 조선시대에는 사촌이라 불렸는데, “모래 마을”이라는 뜻이며 마을에 모래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의 사촌서당 건물은 1998년에 복원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목조 초가이며, 정면에 걸린 현판은 정약전의 동생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약용(1762-1836)의 글씨를 모아 구성한 것이다.
학문에 뛰어났던 정약전은 서양 학문과 사상을 접하고 천주교에 입교하기도 하였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조정은 1801년 천주교를 금지하였고, 이에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여 체포하고 처형하였다. 정약전도 이때 체포되어 완도의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흑산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유배지에서 정약전은 자신이 머물던 사리에 서당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교, 저술 활동에도 전념하였다. 특히 유배 기간 동안 정약전이 저술한 『자산어보』는 한국 최초의 수산학 서적이라고 여겨진다. 정약전은 대둔도 청년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흑산도 근해의 해양 동식물을 55개 항목으로 정리하고, 각 동식물의 명칭, 형태, 습성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사리에는 사촌서당 외에도 흑산도의 역사,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들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흑산도로 유배되었던 역사 인물들을 소개하고 유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유배문화공원(Cultural Park of Exile)이 있다. 또한 마을의 돌담장은 축조 당시의 모습대로 잘 유지되어 있어 2006년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촌서당에서 남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는 1959년에 세운 사리공소가 있다.
개별
사촌서당은 조선 후기 학자인 정약전(1758-1816)이 섬의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다. 서당이 위치한 사리는 조선시대에는 사촌이라 불렸는데, “모래 마을”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사촌서당 건물은 1998년에 복원되었고, 정문, 안채, 사랑채, 부속사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 정면에 걸린 현판은 정약전의 동생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정약용(1762-1836)의 글씨를 모아 구성한 것이다.
정약전은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죄로 1801년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정약전은 자신이 머물던 사리에 서당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교, 저술 활동에도 전념하였다. 특히 유배 기간 동안 정약전이 저술한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해양 동식물을 55개 항목으로 정리한 것으로, 한국 최초의 수산학 서적이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