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이하복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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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이하복 고택
Yi Ha-bok’s House, Seocheon
서천 이하복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서천 이하복 고택
영문명칭 Yi Ha-bok’s House, Seocheon
한자 舒川 李夏馥 古宅
주소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신막로57번길 32-3 (신산리)
지정(등록) 종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97호
지정(등록)일 1984년 12월 24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3필지/1,808㎡
웹사이트 서천 이하복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2022

서천 이하복 고택은 낮은 산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조선 후기 주택으로, 중부지방 고유의 전통가옥구조가 잘 보존된 초가집이다. 1870년대에 목은 이색의 18대손인 이병직(李昺稙, 이하복의 증조할아버지)이 안채 세 칸을 지었고, 1900년대 초에 그의 아들 이형규(李亨珪)가 사랑채, 아래채, 광채를 지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집의 구조는 안마당이 있는 ‘ㅁ’자 형태인데 특이하게 안마당이 두 개로 나누어져 있다. 서쪽의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마당은 사방이 건물로 닫혀 있지만, 동쪽의 아래채와 위채 사이에 있는 마당은 동쪽으로 열려 있다. 열려 있는 쪽에는 나무를 심어 밖에서 집 안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안채는 원래 부엌과 방 2개로 구성된 3칸 집이었으나 후대에 왼쪽의 부엌을 늘리고 오른쪽으로는 대청과 방, 부엌 겸 헛간을 덧달아 현재는 6칸의 ‘ㄱ’자형 구조이다. 사랑채는 ‘ㅡ’자 모양으로 대문간, 부엌, 방 2칸이 나란히 이어져 있으며 방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다. 사랑채 옆에 있는 아래채 역시 ‘ㅡ’자 모양으로 부엌, 안방, 윗방, 광 2칸이 일렬로 나란히 있다. 위채의 구조도 ‘ㅡ’자 모양으로 부엌, 안방, 윗방, 대청이 일렬로 있으며 서쪽에는 외양간이 있다.

서천 이하복 고택은 호서지역 농촌 가옥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로 교육자인 이하복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2022 수정

서천 이하복 고택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인 조선 시대 후기에 지어진 우리나라의 전통 집이다. 이하복 고택은 우리나라 중부지방 전통 농가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집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하복 고택은 초가지붕의 한옥이다. 초가집은 볏짚을 엮은 이엉을 지붕에 얹어서 만든 집으로 주로 오래전 서민들이 살던 곳이다.

고택은 안마당이 있는 구조로, 안마당은 두 개로 나누어져 있다. 처음 만들어진 안채와 뒤를 이어 만들어진 사랑채는 하늘에서 보면 ‘ㅁ’자 모양으로, 우리나라 중부지방 전통가옥의 배치를 잘 보여준다. 그 후에 증축된 위채와 아래채는 ‘=’ 모양인데, 특히 아래채는 며느리의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이는 이하복 고택의 독특한 점으로 이하복 가문의 며느리에 대한 사랑과 변화하는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하복 고택의 진정한 가치는 전통가옥 구조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잘 보존된 세간, 그리고 교육자이자 농촌계몽운동가로 활약했던 청암 이하복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지금도 여전히 고택의 내부에는 여러 대에 걸쳐 생활한 흔적과 다양한 생활 도구가 남아있어 옛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 이 안내판은 이하복 선생님이 설립한 동강중학교 학생들이 이하복 고택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한 알기 쉬운 문화재 안내판입니다.

영문

  • Yi Ha-bok’s House, Seocheon

2022

This thatched-roof house belonged to Yi Ha-bok (1911-1987), a prominent leader of the education and enlightenment movements.

Sinsan-ri Village, where the house is located, has been home to the Yi family ever since Yi Ha-bok’s great-great-grandfather moved here in the mid-19th century. The house was first established in the late 19th century by Yi Ha-bok’s great-grandfather Yi Byeong-jik, was expanded in the early 20th century by Yi Ha-bok’s grandfather Yi Hyeong-gyu (1865-1934), and has since undergone several repairs.

The house consist of a residential area to the left, with a women’s quarters, a men’s quarters, and a storehouse, as well as an auxiliary area to the right, with a lower quarters, an upper quarters, and a storehouse-cum-stable. The buildings of the residential area form a square layout with a courtyard in the middle. The auxiliary area also has a courtyard that is enclosed by several trees.

The women’s quarters was the first building to be constructed. It initially consisted of a kitchen and two underfloor-heated rooms, but was later expanded to include a larger kitchen and a wooden-floored hall, an underfloor-heated room, and a kitchen-cum-storeroom to the right. The men’s quarters consists of a main gate, a kitchen,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with a narrow wooden veranda to the front and right. The lower auxiliary quarters consists of a kitchen, an underfloor-heated room, and a storeroom, while the upper auxiliary quarters consists of a kitchen, an underfloor-heated room, and a wooden-floored hall.

Yi Ha-bok graduated from the Department of Economics at Waseda University in Japan in 1939 and worked at Boseong College (predecessor of Korea University) until 1943. In 1944, in protest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s demand that students join the Japanese army to fight in the Pacific War (1941-1945), Yi resigned from his job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where he joined the rural enlightenment movement.

2022 수정

This house was the residence of Yi Ha-bok (1911-1987), a prominent leader of the modern education and enlightenment movements. In 1939,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Yi graduated from the Department of Economics at Waseda University in Japan and went on to work at Bosung College (today’s Korea University) until 1943. In 1944, Yi resigned from his job in protest of the colonial government’s demand that Korean students join the Japanese army to fight in the Pacific War (1941-1945). He returned to his hometown where he joined the rural enlightenment movement.

The house was first built in the late 19th century, expanded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repaired several times thereafter. Thatched-roof houses such as this one were typically used by commoners, as opposed to the tiled-roof houses of the upper class.

The house can be divided into left and right areas. The area to the left consists of a men’s quarters, a women’s quarters, and a storehouse, which all together form a square layout around an inner courtyard. This layout is typical for the central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The area to the right consists of a lower quarters, an upper quarters, and a storehouse. The lower and upper quarters are arranged parallel to one another with a wide courtyard between them.

The oldest building in the house is the women’s quarters. Traditionally, the family’s daughters-in-law would have resided here with their mother-in-law. However, in this house, the lower quarters was built especially for use by the daughters-in-law. This unique feature shows the Yi family’s affection toward their daughters-in-law as well as the changing times.

The traces of several generations, along with various everyday tools, can still be found inside the house, providing valuable insight into the lives of the people of the past. In recognition of its high value as a house that preserves the original appearance of traditional farmhouses in the central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the house was designated as a National Folklore Cultural Heritage in 1984.

영문 해설 내용

2022

이 초가집은 교육운동가인 이하복(1911-1987)이 살던 집이다.

이 집이 위치한 신산리는 19세기 중반 이하복의 고조할아버지가 입향한 이래로 후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하복의 증조할아버지인 이병직이 처음 이 집을 지은 후 20세기 초에 할아버지 이형규(1865-1934)가 증축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집은 안채, 사랑채, 광채로 구성된 왼쪽의 주거 공간과 아래채, 웃채, 광채로 구성된 오른쪽의 부속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거공간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부속 공간에도 마당이 있으며, 나무를 심어 주변을 에워쌌다.

안채는 이 집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이다. 원래 부엌과 온돌방 2개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증축하면서 부엌을 늘리고 오른쪽에 대청, 온돌방, 부엌 겸 헛간을 덧달았다. 사랑채는 대문, 부엌, 온돌방이 있고, 방 앞쪽과 오른쪽에는 툇마루가 있다. 아래채는 부엌, 온돌방, 광이 있다. 아래채 뒤에는 외양간을 겸한 광채가 있고, 웃채는 부엌, 온돌방, 대청이 있다.

이하복은 1939년 와세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43년까지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서 근무하였다. 일제가 학생들을 강제로 참전시키는 것에 격분하여 1944년 고향으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 고조할아버지는 호만 확인되고 이름은 확인 안됨.

2022 수정

이 집은 근대교육자이자 계몽운동가였던 이하복(1911-1987)이 살던 집이다. 이하복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와세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43년까지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에서 근무하였다. 일제가 한국 학생들을 강제로 태평양전쟁에 참전시키는 것에 격분하여 1944년 고향으로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집은 19세기 후반에 처음 지어진 후 20세기 초에 증축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기와집은 주로 상류층이 살던 집이지만, 이와 같은 초가집은 주로 서민들이 살던 가옥의 형태이다.

이 집은 왼쪽 영역과 오른쪽 영역으로 나뉘어 진다. 왼쪽 영역은 사랑채, 안채, 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한반도 중부지방 전통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른쪽 영역은 아래채, 위채, 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래채와 위채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안채이다. 전통적으로 안채는 집안의 안주인과 며느리가 함께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집에는 며느리의 독립적인 공간인 아래채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하복 고택의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며느리에 대한 사랑과 변화하는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지금도 여전히 고택의 내부에는 여러 대에 걸쳐 생활한 흔적과 다양한 생활 도구가 남아있어 옛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한반도 중부지방 전통 농가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집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갤러리

참고자료

  1. 이하복家의 가계
    • 이병직(운강) - 현 집터에 안채 초창
    • 이형규(1865-1934) - 일본으로 모시를 수출하여 부 축적
    • 이응구(1886-1952)
    • 이하복(청암, 1911-1987)
    • 이기원(1930-2013)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역임. 선친의 호를 따서 청암문화재단 설립.
  2. 이하복 가옥 연혁
    • 19세기 후반 이병직이 안채 신축
    • 20세기 초 이형규가 안채 증축, 사랑채, 아랫채, 웃채 신축

주석

  1. 『한국의 전통가옥 기록화보고서 - 국가민속문화재 제197호 서천 이하복 고택』, 충청남도 서천군, 2017, 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