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운형 묘소
서울 여운형 묘소 Tomb of Yeo Un-hyeong,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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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서울 여운형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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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omb of Yeo Un-hyeong, Seoul |
한자 | 서울 呂運亨 墓所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106-1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등록문화재 제530호 |
지정(등록)일 | 2013년 2월 21일 |
분류 | 등록문화재/기타/인물기념시설 |
수량/면적 | 573㎡ |
웹사이트 | 서울 여운형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여운형(1886~1947)의 묘소이다.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신원리 묘골에서 태어났다. 태양을 치마폭에 품은 태몽을 꾸었다고 하여 그의 할아버지가 몽양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1907년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양평에 지회를 만들어 활동하며 구국 활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1908년, 23세 때 집안 대대로 모셔 온 신주를 모두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노비를 해방시켜 주는 등 자신이 배워 옳다고 생각한 대로 봉건적 악습을 깨뜨리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고, 1918년 11월에는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파견하였다. 이 일로 2·8 독립선언과 3·1 운동 등 항일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도쿄 제국호텔에서 조선 독립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한 명연설로 일본 내각을 뒤흔들기도 하였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보내져 옥살이를 한 뒤,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지금의 대한체육회인 조선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전신인 조선올림픽위원회 등 각종 체육 단체에서 회장이나 위원장을 맡았다. 여운형은 운동 경기를 항일 운동이자 민족 운동의 하나로 여겨 특히 청년들에게 체육으로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옷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일로 폐간되었다.
1944년에는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건국동맹을 결성하였고, 해방 뒤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하여 사회 혼란을 막고 새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1946년 신탁 통치 안을 두고 민족이 좌우로 대립하여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좌우 합작 운동을 주도하였다. 미군정이 통치하는 현실에서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노동자와 농민은 물론 자본가와 지주까지도 포괄하는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정당을 만들어 좌우 세력의 균형을 이루려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우 세력으로부터 12차례 공격을 당하였고, 끝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교차로에서 우익 세력의 총에 맞아 숨졌다. 장례는 해방 뒤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렀다. 국가에서 여운형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주었으며, 2008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여운형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 처리되어 철로 만든 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통일된 조국에 다시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여운형의 묘소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리는 향로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등 돌로 만든 석물들이 있으며, 원형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다.
영문
- Tomb of Yeo Un-hyeong, Seoul
개별
This is the tomb of Yeo Un-hyeong (1886-1947), a Korean politician and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Yeo Un-hyeong was born in Yangpyeong, Gyeonggi-do Province. It is said that his mother, while pregnant with him, dreamt of the sun enveloped in a skirt, so his grandfather gave him the pen name Mongyang, meaning “Sun of Dreams.”
In 1907, after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was initated in Daegu, and Yeo established an affiliated association in Yangpyeong to help repay debts to Japan and regain Korea’s sovereignty. In 1908, he turned away from archaic customs by freeing his family’s slaves and no longer performing Confucian ancestral rituals. In 1914, he went to China to participate in the movement for Korea’s independence. In 1918, he founded the New Korea Youth Association and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November 1919, he also unnerved the Japanese cabinet with an eloquent speech at the Imperial Hotel in Tokyo, insisting on the validity of and need for Korea’s independence.
While in Shanghai in 1929, he was arrested by secret agents of the Japanese police and sent back to Korea where he was imprisoned. In 1933, he was appointed as president of the Joseon Central Daily (Joseon jungang ilbo). In addition, he served as president or chairman of various physical training organizations such as the Joseon Sports Council (today’s 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 and the Joseon Olympic Committee (today’s Korea Olympic Committee). Yeo Un-hyeong regarded sport and athletic competition as a fundamental part of the anti-Japanese and pro-Korean movements, so he reinforced the spirit of independence through the physical training of the youth. In 1936, the Joseon Central Daily was discontinued after posting a photograph depicting Sohn Kee-chung (1912-2002), a Korean who won gold in the marathon at the Berlin Olympics marathon competition as part of the Japanese delegation, with the Japanese flag erased from his shirt.
In 1944, Yeo formed the National Foundation League, a secret independence movement group.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in 1945, the organization became the Committee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al Government, which sought to prevent social disorder and build the nation anew. In 1946, amidst the trusteeship of Korea by the U.S. and Soviet Union, the nation was in danger of being divided, so he led a movement to unify the political left and right under a coalition. In response, he was physically attacked 12 times by both political sides, and in 1947, he was assassinated at Hyehwa-dong Intersection by a member of a nationalist right-wing group. His funeral was the first state funeral to be held following liberation from colonial rule. In 2005 and 2008, respectively, Yeo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Presidential Medal an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the second-highest and highest among the Orders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recognition of his outstanding meritorious services to the country.
Yeo Un-hyeong requested that his body be preserved with formaldehyde and placed in an iron casket, so that he may be re-interred after the reunification of the two Koreas. The base of the round burial mound is surrounded by stone slabs, and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tombstone, a table, an incense table, and two pillars.
권역
Yeo Un-hyeong (1886-1947) was a Korean politician, journalist, and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He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in 1919. He also devoted himself to leading the anti-Japanese movement and laying the basis for the foundation of an independent state by operating various organizations such as the newspaper company Joseon Central Daily (Joseon jungang ilbo) and the National Foundation League, a secret independence movement group. In 2008, Yeo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the highest among the Orders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recognition of his outstanding meritorious services to the country.
영문 해설 내용
개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여운형(1886~1947)의 묘소이다.
여운형은 경기도 양평 출신이다. 태양을 치마폭에 품은 태몽을 꾸었다고 하여 그의 할아버지가 몽양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1907년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양평에 지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집안 대대로 모셔 온 조상들의 위패를 모두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노비를 해방시켜 주는 등 봉건적 악습을 깨뜨리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고, 1918년에는 신한청년당을 만들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도쿄 제국호텔에서 조선 독립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한 명연설로 일본 내각을 뒤흔들기도 하였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보내져 옥살이를 한 뒤,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지금의 대한체육회인 조선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전신인 조선올림픽위원회 등 각종 체육 단체에서 회장이나 위원장을 맡았다. 여운형은 운동 경기를 항일 운동이자 민족 운동의 하나로 여겨 특히 청년들에게 체육으로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일본 대표로 참가하여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옷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일로 폐간되었다.
1944년에는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건국동맹을 결성하였고, 해방 뒤 이 단체는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하여 사회 혼란을 막고 새 국가를 세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1946년 신탁 통치 안을 두고 민족이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좌우 합작 운동을 주도하였다. 미군정이 통치하는 현실에서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노동자와 농민은 물론 자본가와 지주까지도 포괄하는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정당을 만들어 좌우 세력의 균형을 이루려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우 세력으로부터 12차례 공격을 당하였고, 끝내 1947년 혜화동 교차로에서 우익 세력의 총에 맞아 숨졌다. 장례는 해방 뒤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렀다. 국가에서 여운형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주었으며, 2008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주었다.
여운형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 처리되어 철로 만든 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통일된 조국에 다시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여운형의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의 석물들이 있으며, 원형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다.
권역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 또한 신문사인 조선중앙일보사와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건국동맹 등을 이끌며, 항일운동을 이끌고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헌신하였다. 2008년 여운형은 국가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참고자료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 서울 여운형 묘소(서울 呂運亨 墓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4411105300000
- 여운형(呂運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436
- 여운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0302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