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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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선생 묘
Tomb of Seo Seong
서성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서성선생 묘
영문명칭 Tomb of Seo Seong
한자 徐省先生 墓
주소 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산1-14번지
지정(등록) 종목 시도기념물 제35호
지정(등록)일 1976년 8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서성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성(徐渻, 1558~1631)의 묘이다. 서성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이며 본관은 대구이다. 1586년(선조 19)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종9품인 학유(學諭)가 된 후 군사에 관한 일과 무관선발을 담당하는 병조좌랑(정6품)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을 의주까지 호송하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호조판서(정2품)와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하는 병조판서(정2품)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 5년(1613)에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1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형벌을 관장하는 형조판서도 지냈다. 서성은 다섯 개 도의 관찰사와 3조 판서를 지냈으며, 역학(易學)과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묘역에는 둥근 담을 쌓고 사각형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양머리를 장식하고 봉분은 외부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서 높게 두른 다음 흙을 쌓아 올렸다.

묘역의 아래에는 1646년(인조 24)에 세워진 신도비(碑)가 있다. 비는 효종 때 재상을 지낸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오준(吳竣)이 글을 썼으며, 김광현(金光炫)이 전액(篆額)을 쓴 것이다. 묘역은 1968년 후손들이 개수한 네모난 담 안에 원형의 호랑이 모양의 돌을 두른 봉분이 있고 전면에는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웅장한 무인석이 마주하고 있다.

국문 수정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성(徐渻, 1558~1631)과 부인 여산송씨의 합장묘이다.

서성은 1586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재위 1567~1608)를 의주까지 호종하며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던 중 1613년 광해군(재위 1608~1623) 때에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단양과 원주 등에서 1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복귀하였고, 1624년 이괄의 난 때와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였다.

서성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맹인인 어머니는 약현(지금의 중구 만리동)에서 술과 약과를 만들어 팔며 아들을 공부시켰다. 서성의 호 약봉(藥峯)은 약현에서 온 것이며 약주, 약과라는 말도 이때 유래하였다고 한다.

무덤 앞에는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자리하였다. 무덤 뒤쪽에 쌓은 둥근 담은 후손들이 1968년에 개축한 것이다.

묘역 앞쪽 아래에는 1646년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김상헌이 짓고, 오준과 김광현이 글씨를 썼다.

영문

Tomb of Seo Seong

This is the tomb of Seo Seong (1558-1631, pen name: Yakbong), a civil official of the mid-Joseon period, and his wife Lady Song.

Seo Seong lost his father early and was raised solely by his blind mother, who, in order to put her son through education, had to make and sell liquor and snacks in Yakhyeon (the neighborhood behind today's Seoul Station). Seo Seong’s pen name, Yakbong, comes from the name of this neighborhood where he grew up.

Seo S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86. When the Japanese invaded in 1592, he escorted King Seonjo (r. 1567-1608) and the royal family members to refuge near the northern border of the Korean Peninsula, and later served several high-rank official posts. In 1613, during the rule of King Gwanghaegun (r. 1608-1623), Seo Seong was implicated in a literati purge and was exiled to Danyang and Wonju, where he lived for 11 years. After the coup of 1623 which led to King Gwanghaegun’s dethronement, Seo Seong returned to the court and served King Seonjo’s grandson, King Injo (r. 1623-1649), in the fight against the rebellion of 1624 and the Manchu invasion of 1627.

In front of the tomb mound, which inters both Seo and his wife, there are a tombstone, stone spirit seat, stone table, stone incense table, two stone pillars, and two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 wall surrounding the mound was rebuilt by Seo Seong’s descendants in 1968.

There is a stele at the entrance to the tomb area, erected in 1646. The epitaph on it was composed by Kim Sang-heon (1570-1652), a renowned scholar of the mid-Joseon period, and calligraphed by O Jun (1587-1666) and Kim Gwang-hyeon (1584-1647), other scholars of the mid-Joseon peri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