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김적 및 김홍욱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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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김적 및 김홍욱 묘역
Tombs of Kim Jeok and Kim Hong-uk, Seosan
서산 김적 및 김홍욱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서산 김적 및 김홍욱 묘역
영문명칭 Tombs of Kim Jeok and Kim Hong-uk, Seosan
한자 瑞山 金積 및 金弘郁 墓域
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로화곡길 50-13 (대로리)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
지정(등록)일 2010년 12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수량/면적 무덤 2기, 신도비 1기
웹사이트 서산 김적 및 김홍욱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서산 김적 및 김홍욱묘역은 단구자(丹丘子) 김적(1564~1646)과 학주(鶴洲) 김홍욱(1602~1654) 부자의 묘와 김홍욱 신도비*로 이루어져 있다. 김홍욱은 1654년(효종 5)에 소현세자 빈인 회빈 강씨와 두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줄 것을 효종에게 상소하였다가 죽게 되었으나, 그의 강직한 절개는 조선 사림의 상징이 되어 존경받았다. 그는 경주 김씨 학주공파의 중시조이며, 이 집안에서는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와 경주 김씨의 2대 명문으로 꼽힌다.

김홍욱 묘는 죽은 이듬해인 1655년(효종 6) 부모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지금 자리에 조성되었다. 이 묘는 그와 부인 동복 오씨의 봉분을 만들고 그 앞에 혼유석, 상석, 묘비, 망주석, 문인석 등을 세웠다. 묘비문은 1746년 박필주가 지어 세웠으나 1995년 비를 갈아 다시 세웠다. 김홍욱 신도비는 1674년에 맏아들 김세진이 덕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을 찾아가 비문을 받았다가 1772년에 5세손 김구주에 이르러서야 묘역 입구인 현재 자리에 세워졌다.

김적 묘는 그와 부인 화순 최씨 봉분을 마련하고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비, 망주석, 동자석, 문인석 등을 설치했다. 이 묘는 상석 앞에 세워 놓던 묘표를 대신해 혼유석을 새로 만들고 봉분 옆에 묘비를 세워 17세기 무덤의 석물 변화를 잘 반영하였다. 묘비는 조익이 짓고, 김홍욱이 지었으며, 머리에는 용과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금관을 쓰고 예복을 입은 형태의 문인석도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영문

Tombs of Kim Jeok and Kim Hong-uk, Seosan

These tombs belong to the father and son Kim Jeok (1564-1646) and Kim Hong-uk (1602-1654), both civil officials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their wives.

Born in Seosan, Kim Jeok passed the classics licentiate examination in 1609 and served as an official. However, tired of the political turmoil, he resigned and retired to his hometown, where he devoted himself to teaching his students.

Kim Hong-uk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635 and served in various official posts. In 1654, during the reign of King Hyojong (r. 1649-1659), he submitted a petition to posthumously restore the honor of a consort of the king’s late older brother, Crown Prince Sohyeon (1612-1645), and two of their sons. The consort Lady Kang (?-1646) had been sentenced to death by poison after being falsely accused of a political plot against the royal authority, while two of their three sons, young children at the time, had died of illness while in exile on Jejudo Island. However, because their posthumous reinstatement threatened King Hyojong’s authority, the furious king interrogated Kim directly and had him killed. Kim’s unwavering integrity became highly revered as a symbol of the Joseon literati, and he was posthumously promoted to minister of personnel in 1718.

The burial mounds of Kim Jeok and his wife Lady Choe stand side by side. In front of the burial mounds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typical of 17th-century tombs, including a spirit seat, a table, an incense table, a tombstone, two pillars, and statues of children and civil officials. The tombstone’s inscription was composed by Kim Hong-uk, and its capstone is elaborately decorated with dragon and cloud designs.

It was Kim Hong-uk’s final wish to be buried near his parents, so his tomb is located about 100 m to the southeast. His wife Lady O is buried in the mound next to his. In front of the burial mounds are various stone structures, including a spirit seat, a table, a tombstone, two pillars, and two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 tombstone, which was replaced in 1995, features an inscription composed in 1746 by the civil official Bak Pil-ju (1860-1748).

A stele commemorating Kim Hong-uk’s life and achievements stands at the entrance to the tomb area. The stele features an inscription composed in 1674 by the renowned scholar and civil official Song Si-yeol (1607-1689) upon the personal request of Kim Hong-uk’s eldest son Kim Se-jin. The stele was erected in 1772 by Kim Gu-ju (1740-1786), a 5th-generation descendant of Kim Hong-uk.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 문신인 김적(1564-1646)과 김홍욱(1602-1654) 부자와 그들의 부인의 묘역이다.

김적은 서산 출신으로, 1609년 생원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지만, 혼란한 정국에 탄식하여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홍욱은 16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효종(재위 1649-1659) 때인 1654년 김홍욱은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1612-1645)의 빈과 두 아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강빈(?-1646)은 왕권을 둘러싼 정쟁에서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았고, 어린 아들들은 제주에 유배된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을 신원하는 것은 효종의 정통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김홍욱은 격노한 효종으로부터 친국을 받다가 죽게 되었다. 김홍욱의 강직한 절개는 조선 사림의 상징으로 큰 존경을 받았으며, 1718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적의 묘는 부인 화순최씨의 묘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두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비, 망주석, 동자석, 문인석 등이 있으며, 17세기 무덤의 석물 형식을 잘 보여준다. 묘비의 비문은 김홍욱이 지었으며, 비의 머릿돌에는 용과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김홍욱 묘는 부모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남동쪽으로 100여 m 떨어진 자리에 조성되었다. 부인 동복오씨의 묘가 나란히 놓여 있으며, 두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묘비, 망주석, 문인석 등이 있다. 묘비의 비문은 1746년 문신 박필주(1860-1748)가 지었고, 1995년 비를 갈아 다시 세웠다.

묘역 입구에는 김홍욱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있다. 김홍욱 신도비의 비문은 1674년에 맏아들 김세진이 저명한 학자이자 문신인 송시열(1607-1689)을 직접 찾아가 받은 것이다. 신도비는 1772년 5세손 김구주(1740-1786)가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