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문익점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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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문익점 효자비
Stele of Mun Ik-jeom for His Filial Devotion, Sancheong
대표명칭 산청 문익점 효자비
영문명칭 Stele of Mun Ik-jeom for His Filial Devotion, Sancheong
한자 山淸 文益漸 孝子碑
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지정(등록)일 1983년 7월 20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소유자 남평문씨 종중
관리자 남평문씨 종중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산청 문익점 효자비,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산청 문익점 효자비는 고려 말 학자이자 문신인 문익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이 위치한 곳은 과거 문익점이 살았던 마을이다. 고려 우왕 9년(1383)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면서 비를 세웠고, 마을의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라고 하였다.

문익점은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 전해진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당시는 왜적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로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노략질이 심하였다. 마을에 왜적이 침입하자 백성들은 이를 피해 피난을 갔으나 그는 홀로 남아 평상시와 같이 곡을 하고 어머니의 묘를 지켰다. 이를 본 왜적들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나무를 다듬어 ‘효자를 해치지 말라’라고 써서 세웠고 그때부터 이 지역이 평안했다고 한다.


  •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영문

Stele of Mun Ik-jeom for His Filial Devotion, Sancheong

This stele located in Sawol-ri Village commemorates the filial devotion of the civil official and scholar Mun Ik-jeom (1329-1398), who is well known for having brought cotton to Korea. The three large characters inscribed on the front of the stele mean "Village of the Filial Son."

The story of Mun Ik-jeom’s filial devotion is as follows. Upon the death of his mother, Mun Ik-jeom built a hut next to her tomb, which was located in this village, in order to carry out his mourning duties. However, during the mourning period, Japanese pirates invaded and began violently plundering the village, which was a frequent occurrence in 14th-century Korea. The village people all fled, but Mun Ik-jeom remained, wailing in mourning and guarding his mother’s tomb as he regularly did. When the Japanese pirates saw this, they were moved by his filial devotion and inscribed the words “Spare the filial son” onto a tree, which brought peace to the area. In honor of his filial devotion, the royal court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bestowed Mun Ik-jeom with a commemoration in 1383.

영문 해설 내용

사월리에 있는 이 비는 한국에 목화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한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학자 문익점(1329-139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석 앞면에 크게 새겨진 세 글자는 ”효자 마을”이라는 뜻이다.

문익점의 효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익점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마을에 묘를 조성하고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렀다. 당시는 왜적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로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노략질이 심하였다. 마을에 왜적이 침입하자 백성들은 이를 피해 피난을 갔으나 그는 홀로 남아 평상시와 같이 곡을 하고 어머니의 묘를 지켰다. 이를 본 왜적들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나무를 다듬어 ‘효자를 해치지 말라’라고 써서 세웠고 그때부터 이 지역이 평안했다고 한다. 1383년 고려 조정에서는 문익점의 효행을 칭송하는 정려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