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만회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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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만회 고택
Manhoe Historic House, Bonghwa
대표명칭 봉화 만회 고택
영문명칭 Manhoe Historic House, Bonghwa
한자 奉化 晩悔 古宅
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51
지정(등록) 종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69호
지정(등록)일 1984.01.14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
수량/면적 9필지/2,912㎡



해설문

국문

만회 고택은 조선 순조 때의 문신(文臣)인 만회(晩悔) 김건수(金建銖, 1790~1854) 선생이 살던 집이다. 고택은 바래미마을의 오른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우거진 뒷동산을 배경으로 해서 남향을 하고 있다.

선생의 자는 공립(公立)이고 호는 만회(晩悔)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순조 30년(1830)에 문과에 급제하여 현풍현감(玄風縣監), 김해부사(金海府使) 및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이 고택은 ‘冂’자형의 안채와 ‘丅’자형의 사랑채, ‘一’자형의 중문간채가 튼 ‘口’자형의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선생의 6대조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이곳에 살던 여씨(余氏)로부터 매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의 경우는 선생이 직접 건립하였으며, 철종 1년(1850)에 중수(重修)한 바 있다. 안채의 중앙에는 대청이 있고, 대청 양쪽에 안방과 상방(上房, 주인이 거처하는 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안채의 오른쪽으로 치우쳐 위치해 있다.

만회 고택은 1919년에 3.1운동 직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등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의 초안을 작성한 곳이기도 하다. 만회 고택은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곳이다. 또한 경북 북부 지방의 ‘口’자형 옛 건물의 평면 배치법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조선 시대 주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문

This traditional Korean house was used as the residence of Kim Geon-su (1790-1854, pen name: Manhoe), a civil official and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is house consists of a main quarters, outer quarters, and a gate quarters. The outer quarters, called Myeongwollu (明月樓), meaning “pavilion of the bright moon,” was built by Kim Geon-su and reconstructed in 1850. It is said that when the ancestors of Kim Geon-su first moved to this village in the late 17th century, they purchased the main quarters from a family of the Yeo Clan who lived in this area.

Right after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Kim Chang-suk (1879-1962), a renowned Confucian scholar and an independence activist, gathered Confucian scholars in this house and wrote a draft of a petition for Korea’s national independence to be submitted at the Paris Peace Conference.

영문 해설 내용

이 한옥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였던 김건수(1790-1854, 호: 만회)가 살던 곳이다.

만회고택의 사랑채 명월루는 김건수가 건립하였으며 1850년에 고쳐 세웠다. 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인 김성구(1641-1707)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오면서 선주민이었던 여씨로부터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창숙(1879-1962)을 중심으로 유림들이 이곳에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