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송간 신도비와 영보재
| 보성 송간 신도비와 영보재 Stele of Song Gan and Yeongbojae Ritual House, Bos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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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명칭 | 보성 송간 신도비와 영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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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명칭 | Stele of Song Gan and Yeongbojae Ritual House, Boseong |
| 한자 | 寶城 宋侃 神道碑와 永報齋 |
|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원동안길 34-8 (척령리) |
| 지정(등록) 종목 |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 |
| 지정(등록)일 | 2016년 3월 24일 |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 시대 | 조선시대 |
| 수량/면적 | 4필지/1,755㎡ |
| 웹사이트 | 보성 송간 신도비와 영보재,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
해설문
국문
보성군 벌교읍 척령리 원동마을에는 충강공 송간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간 신도비와 영보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유적은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보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충강공 송간(宋侃, 1415~?)은 단종 3년(1455년), 왕명을 받아 호남 지역을 순시하던 중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즉시 영월로 가서 복명한 뒤, 대성통곡하며 고향 여산으로 내려가 두문불출했다. 이후 단종이 승하하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상을 치르고, 지금의 고흥군 한 산속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충절은 높이 평가되어 정조 17년(1793년), ‘충강(忠剛)’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영보재는 여산 송씨 문중에서 충강공 송간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후손 송규성이 1800년에 처음 세웠으며, 이후 1921년과 1979년에 중건되었다. 영보재는 남향으로 배치된 정면 5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앞뒤로 퇴칸(퇴마루)이 있는 장방형 구조이다. 좌우의 방 한 칸씩과 가운데 3칸의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상량문과 중건기등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어 그 가치가 크다.
송간 신도비는 영보재로 가는 길목에 세워져 있으며, 조선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신도비는 1919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비문은 조선 말기 저명한 학자인 연재 송병선이 짓고,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활동한 면암 최익현이 글씨를 썼다. 또 다른 비문은 윤영구가 짓고, 김순동이 글씨를 남겼다.
보성 송간 신도비와 영보재는 조선 초기 충절을 지킨 인물인 충강공 송간의 유적으로, 보성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영문
Stele of Song Gan and Yeongbojae Ritual House, Boseong
This stele and ritual house were built to honor Song Gan (1415-?), a loyal subject of the early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The stele records Song Gan’s life and achievements, while the ritual house, named Yeongbojae, is used for the preparation of ancestral rituals and the maintenance of his tomb, which is located behind the ritual house.
Song Gan is remembered for his loyal devotion to King Danjong (r. 1452-1455), who was forced of the throne and exiled to Yeongwol by his uncle, who became King Sejo (r. 1455-1468). Song Gan heard news of these events while inspecting the Jeolla-do region on King Danjong’s order and immediately went to Yeongwol to report on his inspection. Upon seeing the deposed king, Song Gan wept bitterly before returning to his hometown. After King Danjong’s passing, he mourned in the mountains for three years before retreating deep into the secluded forests of present-day Goheung-gun County, where he is said to have lived out the rest of his life in seclusion.
The stele is presumed to have been made in 1919 to replace an original stele from the late Joseon period. Its inscription is composed by the renowned scholar Song Byeong-seon (1836-1905) and calligraphed by the scholar and anti-Japanese movement leader Choe Ik-hyeon (1833-1906).
The ritual house was originally built in 1800 by Song Gyu-seong, a descendant of the Yeo San Song clan to which Song Gan belonged. It was later reconstructed in 1921 and again in 1979. The southerly facing building measures five bays in width by one bay in depth and has a hip and gable roof. It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in the center with underfloor-heated rooms to either side, with narrow wooden verandas along the front and back. Held inside the building are various records documenting the building’s construction and subsequent renovations.
영문 해설 내용
이 신도비와 재실은 조선 초기의 충신 송간(1415-?)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신도비에는 송간의 생애와 업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재실인 영보재는 제사를 준비하고 그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한 곳이다. 송간의 묘소는 재실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송간은 단종(재위 1452-1455)에 대한 충절로 기억된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훗날 세조, 재위 1455-1468)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로 유배되었다. 송간은 단종의 명을 받아 전라도 지역을 순시하던 중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로 가서 순시 내용을 보고하였다. 폐위된 왕을 만난 그는 통곡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깊은 산속에서 3년간 상을 치르며 애도하였고, 이후 전라남도 고흥군의 깊은 산속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송간의 신도비는 조선 말기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신도비는 1919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저명한 학자인 송병선(1836-1905)이 지었고,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활동한 최익현(1833-1906)이 글씨를 썼다.
영보재는 여산송씨 가문의 후손 송규성이 1800년에 처음 세웠으며, 이후 1921년과 1979년에 중건되었다. 영보재는 남향으로 배치된 정면 5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고, 앞뒤로 툇마루가 있다. 내부에는 건물의 건축 및 중건 내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동영상
참고자료
- “조선 초기 충절인물 서재 송간의 신도비”, 호남학산책, 한국학호남진흥원, 2020.06.19. https://www.hiks.or.kr/HonamHeritage/20/read/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