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정 재사
반구정 재사 Bangujeong Pavil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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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반구정 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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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Bangujeong Pavilion |
한자 | 伴鷗亭 齋舍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옹정골길 81-7 (정상동)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8호 |
지정(등록)일 | 1992년 7월 18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 | 3동 |
웹사이트 | 반구정 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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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반구정은 반구옹 이굉(伴鷗翁 李肱)이 중종 25년(1530)경에 처음 지은 정자이며 이후 퇴락하여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영조16년(1740) 이굉의 7대손 팔회당(八懷堂) 이시항(李時沆)이 주도하여 대대적으로 다시 지었다. 지금의 반구정은 1945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다시 중건한 것이다.
이굉은 고성이씨 가운데 안동에 처음 들어온 이증(李增, 1419~1480)의 손자이고 임청각을 지은 이명(李洺)의 아들이다. 중종 26년(153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고향에서 자적하였다.
낮은 돌담을 두른 경내에는 반구정, 동재·서재, 장판각, 비각이 있다.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숙박이 가능한 체류형 시설을 갖춘 이 구조는 1740년 이시항이 중건할 당시 새롭게 설계된 구조이며 이후 문중의 대표적인 강학처로 활용됨은 물론, 이곳에서 시부(詩賦)를 읊고 강론하는 것이 선비의 등용문이었다고 할 만큼 지역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각에는 숙종 26년(1700)에 건립한 ‘고성이씨 삼세유허비’가 있다. 이 비석은 이명, 이굉,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까지 3대가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서 은거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영문
Bangujeong Pavilion
Bangujeong Pavilion was first established around 1530 by Yi Goeng. It fell into disrepair and was rebuilt in a larger scale in 1740 by Yi Si-hang, a 7th-generation descendant of Yi Goeng. The pavilion burned down in 1945 and was built anew in 1946.
Yi Goeng was the grandson of Yi Jeung (1419-1480), the first person of the Goseong Yi Clan to settle in Andong, and the son of Yi Myeong, who is known for having built Imcheonggak House. He passed the classics licentiate examination in 1531, but did not pursue an official career, instead choosing to remain in his hometown like his father.
The complex is surrounded by a low stone enclosure wall and consists of Bangujeong Pavilion, two dormitories, a printing woodblock repository, and a stele pavilion. It is unusual for a pavilion to have dormitories, and it is presumed that these were added during the 1740 reconstruction. Not only did the Yi family use this pavilion as their main venue for lectures, but reciting poetry and holding discussions at this pavilion was an important stepping stone for local scholars.
The stele was erected in 1700 to commemorate three generations of the Goseong Yi Clan who gave up official careers and retired in Andong, namely Yi Myeong, Yi Goeng, and Yi Goeng’s son Yi Yong.
영문 해설 내용
반구정은 이굉이 1530년 무렵에 처음 지은 정자이며 이후 퇴락하여 빈터만 남아 있던 것을 1740년 이굉의 7대손 이시항이 주도하여 대대적으로 다시 지었다. 지금의 반구정은 1945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다시 중건한 것이다.
이굉은 고성이씨 가운데 안동에 처음 들어온 이증(1419-1480)의 손자이고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아들이다.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고향에서 자적하였다.
낮은 돌담을 두른 경내에는 반구정, 동재·서재, 장판각, 비각이 있다.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숙박이 가능한 시설을 갖춘 이 구조는 1740년 중건할 당시 새롭게 설계된 것이다. 이후 문중의 대표적인 강학처로 활용됨은 물론, 이곳에서 시부(詩賦)를 읊고 강론하는 것이 이 지역 선비의 등용문이었다.
비각에는 이명, 이굉, 이굉의 아들 이용까지 3대가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서 은거한 것을 기리기 위해 1700년에 세운 비석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
반구정 | Place | 반구정 | |
이굉 | Actor | 이굉(李肱) | |
이명 | Actor | 이명(李洺) | 이굉의 아버지. 임청각 지음 |
이증 | Actor | 이증(李增, 1419-1480) | 이명의 아버지.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
이시항 | Actor | 이시항(李時沆) | 이굉의 7대손. 중건자 |
1945년_화재 | Event | 1945년_화재 |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에 중건함. |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 Object |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 이명-이굉-이용 3대가 은거하는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 |
이용 | Actor | 이용(李容) | 이굉의 아들. |
어은정 | Place | 어은정 | 이용이 세운 정자. |
임청각 | Place | 임청각 | 이명이 세움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
반구정 | 이굉 | constructor |
반구정 | 이굉 | isNamesakeOf |
이증 | 이명 | hasSon |
이명 | 이굉 | hasSon |
이굉 | 이용 | hasSon |
어은정 | 이용 | constructor |
이굉 | 이시항 | hasDescendant |
반구정 | 이시항 | renovator |
반구정 |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 hasPart |
반구정 | 1945년_화재 | isDamagedBy |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 이굉 | commemorates / isSteleOf |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 이명 | commemorates / isSteleOf |
고성이씨_삼세유허비 | 이용 | commemorates / isSteleOf |
임청각 | 이명 | constructor |
참고자료
- 반구정,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794 → 원래 반구정 터는 이명이 귀래정(歸來亭) 동편의 수려한 강산을 동경하여 이곳에 정자를 지어 형 이굉(李汯)과 함께 노년을 보낼 것을 기약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한 곳이다. 이명은 형인 이굉을 따라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형인 이굉은 강 아래에 귀래정을 짓고 이명은 강 건너편 상류에 안동 임청각을 지어 거처하였다. 그러나 강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굉과 이명은 자주 만나지 못하였다. 그 뒤 반구정은 이명의 아들 이굉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굉 또한 벼슬에 뜻이 없어 안동 지역으로 돌아와 은거하니 반구정은 고성이씨(固城李氏)가 내리 삼세(三世) 동안 벼슬을 그만두고 수양하던 터전이 되었다.
- 반구정재사, 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 http://www.cultureline.kr/html/contents/heritage/03.html?page=12&area=5&type=-1&hc=-2&sk=2&sv=&seq=351 → 처음에는 정자 건물만 있었는데, 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이 반구정에서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어 많은 선비가 출입하였다. 이종악(臨淸閣)의 문회계로 이 정자는 문중 자제를 위한 교육 공간이 되어 동재와 서재, 장판각, 주사까지 건축하며 서원의 강학 공간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1700년(숙종 26)에는 이명, 아들 이굉, 손자인 이용(李容)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빈 터만 있었던 것을 1740년(영조 16)에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으며, 1945년 정자만 소실되어 1946년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재사는 1905년에 중건된 것이다.
- 반구정재사, 발길 닿는대로 홀로 거니는 길, 네이버 블로그, 2017.10.26. https://blog.naver.com/a1k1/221124640924 → 사진 확인
- 반구정, 안동의 고가 http://www.gotaek.kr/coding/sub1/sub1_2.asp?seq=83&code_area=%BE%C8%B5%BF%B4%EF%B1%C7%BF%AA&gotaek_nm=%B9%DD%B1%B8%C1%A4&type_group=18 → 반구정은 숙부인 이굉이 건립한 귀래정 동쪽에 있으며, 방형의 토담으로 둘러쌓인 일곽은 남향배치된 반구정 앞에 동서재가 놓이고 그 앞에 장판각과 비각이 배치되었다. 재사는 반구정의 동쪽 담 밖에 튼 口자로 남향하여 놓여 있다. 정면 4칸중 가운데 2칸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 1칸 온돌방을 들인 후 전면에 반칸규모로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8 固城 李氏 臨淸閣 李명, 주간한국, 2006.12.10 https://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612/wk2006121022260137070.htm → 10대손에 이르러 이원(李原, 1368-1429)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좌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처남이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여섯째아들에 이증(李增)이란 이가 영산현감을 지내다 안동으로 낙향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입향조인 이증은 당시 지역을 대표하던 12인과 함께 유향계를 조직해 향촌사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증의 셋째아들이 임청각 이명이다. 이명의 여섯째아들인 반구옹(泮鷗翁) 이굉(李肱)은 부친인 임청각의 유지를 받들어 집을 맡았다. 이는 임청각 재세시‘여섯째아들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여섯째집이 잘 된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임청각의 가세(家勢)가 좋았다.
- [귀래정(안동)] 항목 참조 → 반구정은 숙부인 이굉이 건립한 귀래정 동쪽에 있으며, 방형의 토담으로 둘러쌓인 일곽은 남향배치된 반구정 앞에 동서재가 놓이고 그 앞에 장판각과 비각이 배치되었다. ; 귀래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이굉(李浤, 1441-1516)이 1513년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이굉은 고성이씨의 안동 입향조인 이증(1419-1480)의 둘째 아들이다. / 이증의 둘째 아들 이름과 이명의 여섯째 아들 이름이 ‘이굉’으로 같으나 한자가 다르며, 두 사람은 백부와 조카 사이. 귀래정 동쪽 방향에 반구정이 있다고 함.
- [임청각] 항목 참조 → 이명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했던 선조의 공훈을 인정받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갔으며,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이 즉위한 이후 풀려나 의흥(지금의 군위 지역)의 지방관을 지냈다.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