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 선생 유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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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선생 유허
Historic Site Related to Bak Paeng-nyeon
박팽년 선생 유허,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박팽년 선생 유허
영문명칭 Historic Site Related to Bak Paeng-nyeon
한자 朴彭年 先生 遺墟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우암로326번길 28 (가양동)
지정번호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정일 1989년 3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순절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720㎡
웹사이트 박팽년 선생 유허,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박팽년선생유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이 태어나서 성장한 회덕현 흥농촌 왕대벌(현재 동구 가양동)에 있는 집터이다.

박팽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형조판서를 지낸 박중림(朴仲林)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종 16년(1434)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 부제학, 충청도관찰사, 형조참판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세조 2년(1456)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했으나 김질(金礩)과 그 장인 정창손(鄭昌孫)의 고발로 발각되어 국문을 받은 후 옥중에서 사망했다.

이후 현종 9년(1668) 4월에 송시열이 회덕박선생유허비(懷德朴先生遺墟碑)에 그의 생가 터가 황폐되어 알아볼 수 없고 정자 주춧돌만 논 가운데 남아 있다고 기술했다. 1672년에 유림들이 박팽년을 추모하고자 하는 뜻을 모아 회덕현의 물자 지원을 얻어서 정자를 복구하였다. 정자에 장절정(壯節亭)이라 이름을 붙이고, 그 동쪽으로 100보 떨어진 지점에 직절당(直節堂)이라는 재실을 지어 제관(祭官: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재결(齋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몸을 깨끗하게 함)하는 장소로 삼았다. 현재의 비각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16대손 박상동이 고쳐 지었다.

영문

Historic Site Related to Bak Paeng-nyeon

This historic site is the birthplace of the civil official Bak Paeng-nyeon (1417-1456).

Bak Paeng-nyeon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434 and served several government posts. He was known for being a talented writer and calligrapher. While serving a post at the royal research institute, he gained the affection of King Sejong (r. 1418-1450), and later, King Munjong (r. 1450-1452). In 1455, when Prince Suyang (i.e. King Sejo, r. 1455-1468) usurped the throne from his nephew King Danjong (r. 1452-1455), Bak together with other loyal subjects of Danjong planned to return the throne to the young king. But when their plan was exposed, Bak was tortured and died in prison. Bak’s honor was posthumously reinstated in 1691, and he was posthumously promoted to minister of personnel in 1758.

After Bak Paeng-nyeon’s death, the house that stood here became stigmatized as the house of a traitor and was abandoned. In 1668, the local Confucian community erected a stele honoring Bak, and in 1672, a pavilion was built to house the stele. The pavilion was destroyed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and was rebuilt by Bak Sang-dong, a 16th-generation descendant of Bak Paeng-nyeon. It is said that a ritual house for the preparation of veneration rituals was also built to the east of the pavilion, but it no longer remains.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신 박팽년(1417-1456)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박팽년은 1434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로 이름이 높았으며, 집현전의 관원으로 세종(재위 1418-1450)과 문종(재위 1450-1452)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재위 1452-1455)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반대한 이들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모의는 발각되었고, 박팽년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었다. 이후 조선의 대표적인 충신의 한 사람으로 꼽혀왔으며, 1691년 명예가 회복되고 1758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집터는 역적의 집이라 하여 한때 황폐화되었는데, 1668년 지역 유림이 박팽년을 기리기 위한 유허비를 세우고 1672년 비각을 지었다. 지금의 비각은 한국전쟁 중에 파괴되었던 것을 박팽년의 16세손인 박상동이 고쳐 지은 것이다. 비각 동쪽에 제사 준비를 위한 재실도 함께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참고자료

  • <新청풍명월> (92) 박팽년 선생 유허지, 금강일보, 2013.1.30. http://www.g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509 -> 박팽년 선생의 유허지는 역적의 집이라 하여 모두 파헤쳐진 채 빈 터에 유허비만 세워져 있는데, 유허비는 선생이 옥사한 뒤 200여 년이 지난 현종 9년(1668) 충청도 유림들을 중심으로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현종 13년(1672)에는 비각을 지어 장절정(壯節亭)이라 했다. 박팽년 선생은 숙종 17년(1691) 명예가 회복되고,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로 추증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복원은 없다. 비각도 6·25 때 파괴 되었던 것을 16대손 박상동씨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 박팽년선생유허, 대전동구문화원 http://www.dgcc.or.kr/history/sub73.asp?PageNum=7 -> 헌종13년(1672)에 비각을 세우고 장절정(壯節亭)이라 하였다. 그후 한국전쟁때 무너지고 비석만 남은 것을 후손이 중건하였고, 1975년 시에서 주변을 매입하여 담장과 삼문을 설치하고 소공원으로 정화하였다.(해당 정보 확인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