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의사 생가
박상진 의사 생가 Birthplace of Bak Sang-j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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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박상진 의사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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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Birthplace of Bak Sang-jin |
한자 | 朴尙鎭 義士 生家 |
주소 | 울산광역시 북구 박상진길 23 (송정동) |
지정(등록) 종목 |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 |
지정(등록)일 | 1997년 10월 9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
수량/면적 | 2동 총4동 |
웹사이트 | 박상진 의사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울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고헌 박상진 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1825년 지어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등 건물 6동이 ‘ㅂ’자로 배치되어 있다.
1959년 태풍 때문에 행랑채가 무너져 다시 지었는데, 이때 솟을대문*을 평대문**으로 바꾸었다. 울산광역시가 2002년 생가를 사들여 복원 정비 사업을 시작하였고 2007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박상진 의사는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 지원에 발령 받았으나 사퇴한다.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15년 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을 맡아 활동하다가 1918년 체포되어 1921년 순국하였다.
- 솟을대문: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
- 평대문: 기둥의 높이를 행랑채의 높이와 같게 한 대문
영문
Birthplace of Bak Sang-jin
This house is the birthplace of Bak Sang-jin (1884-1921), an independence activist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Bak Sang-jin passed the judiciary exam in 1910 and was appointed to the Pyeongyang District Court, but retired soon thereafter and joined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1915, he founded the Korean Liberation Association and served as its commander-in-chief as it grew in the late 1910s to become the country’s largest independence activist organization. After being arrested in 1918 by the Japanese colonial police, he was sentenced to death in 1921, thus sacrificing his life for the country.
This house was built in 1825 and consists of six buildings including a men’s quarters, women’s quarters, and servants’ quarters. Bak Sang-jin sold the house when he liquidated his family’s assets to help finance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servants’ quarters was once rebuilt after having collapsed during a typhoon in 1959, and the other buildings also underwent several repairs which modified their appearance. The Ulsan Metropolitan Government purchased the house in 2002 and restored it based on archaeological evidence and historical records in 2007.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이 태어난 곳이다. 박상진은 1910년 판사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 받았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5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을 맡았으며,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독립군 단체로 성장하였다. 1918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아 1921년 순국하였다.
이 집은 1825년에 지어졌으며 사랑채, 안채, 행랑채 등 건물 6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상진이 집안의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 집도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다. 행랑채는 1959년 태풍으로 무너져 다시 지었고, 다른 건물들도 이후에 수리를 거치며 변형되었다. 울산광역시가 2002년 생가를 사들였고 2007년 복원 정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