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 효자 정려비
박구 효자 정려비 Stele of Bak Gu for His Filial Devo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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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박구 효자 정려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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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of Bak Gu for His Filial Devotion |
한자 | 朴矩 孝子 旌閭碑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16호 |
지정(등록)일 | 1999년 3월 1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박구 효자 정려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이 비석은 조선 중종 때 좌군도총제*를 지낸 박구의 효행을 표창한 효자 정려비이다.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비석이나 나무판에 정려된 인물의 이름 등을 간략히 적었다. 그리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건물을 짓기도 했는데, 이를 정려각이라 한다.
박구는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어머니 이씨가 병이 들자 천지신명께 빌어 얼음 위로 뛰어오르는 잉어를 구했으며, 눈 속에서 복숭아를 얻어 어머니의 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묘 곁을 지켰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조선 중종 30년(1535)에 정려가 내려져 정려비와 정려각이 함께 세워지고, 자헌대부 예조판서*의 관직을 받았다.
정려의 건립이 엄격하던 시대에 정표가 내려져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하고, 당시의 풍속 등을 고려할 때 역사적·학술적으로도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 원래는 어머니의 묘소 근처인 백천 가에 있었으나, 홍수로 인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조선 순조 18년(1818)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 좌군도총제 : 조선 건국 후 최고 군령 기관인 의흥삼군부 또는 승추부로부터 중앙군(중, 좌, 우의 3군)은 군령을 전달받아 다시 각 군에 소속된 하급 부대에 전달하였다. 좌군에는 도총제, 총제, 동지총제 등이 있었다.
- 자헌대부는 조선시대 정2품에게 주던 품계이다. 예조는 조선시대 중앙행정관청의 하나로 제사, 외교, 학교, 과거시험에 대한 일을 관장하였고, 예조판서는 예조의 최고 관직 명칭이다.
영문
Stele of Bak Gu for His Filial Devotion
This stele erected in 1535 commemorates the filial devotion of Bak Gu (?-1425).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commemorative plaques or steles were bestowed by the government to honor a person’s patriotic loyalty, filial devotion, or matrimonial devotion and were meant to be hung on red gates or installed in front of the honored family’s home.
Bak Gu was known for his exemplary filial devotion. It is said that once in the depths of winter when his mother fell ill, Bak Gu prayed to the gods of heaven and earth who helped him catch a carp in the frozen river and find a peach in the snow so that he could cure his mother. Later when she died, Bak spent the required multi-year mourning period living in a hut next to her tomb and did not step into his house even once. In 1535, he posthumously received a commemoration for his filial devotion and an honorary post as minister of rites. The same year, a stele and a pavilion were erected on the bank of Baekcheon Stream near his mother’s tomb. Following a flood, the stele and pavilion were moved elsewhere for some time, before being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in 1818.
영문 해설 내용
박구(?-1425)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535년에 세워진 정려비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박구는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어머니 이씨가 병이 들자 천지신명께 빌어 한겨울에 언 강에서 잉어를 구했으며, 눈 속에서 복숭아를 얻어 어머니를 보살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묘 곁을 지켰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인 1535년 효행을 인정 받아 정려와 예조판서의 관직을 받았다. 이때 어머니의 묘소 근처인 백천 가에 정려비와 정려각이 함께 세워졌다. 이후 정려비와 정려각은 홍수로 인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1818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참고자료
- 박구, 디지털칠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chilgok.grandculture.net/chilgok/toc/GC02300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