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박양춘 여표비각
밀양 박양춘 여표비각 Stele of Bak Yang-chun for His Filial Devo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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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밀양 박양춘 여표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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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of Bak Yang-chun for His Filial Devotion |
한자 | 密陽 朴陽春 閭表碑閣 |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송포로 194 (후사포리)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
지정(등록)일 | 1993년 1월 8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밀양 박양춘 여표비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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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여표비란 정려*의 표시로 세워두는 비를 말한다. 이 여표비와 비각은 1912년에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효행으로 이름을 날린 모헌 박양춘(慕軒 朴陽春)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박양춘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무덤까지 30리 길을 걸어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다니고, 낮에는 어머니를 모시는 일과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특히 전란 중에 어머니와 할머니의 상을 당하자 피난을 가지 않고 밤낮으로 슬피 울며 관을 지켰다.
이 장면을 지켜본 왜장이 감복하고 마을 입구에 “하늘에서 내린 효자”라는 표지를 세워 왜군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여표비의 시초이다. 이후 고을에서 정려각을 세웠으나 불에 타 없어졌고, 옛 자취가 남은 터에 밀양 유림이 비와 비각을 다시 세웠다.
-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영문
Stele of Bak Yang-chun for His Filial Devotion, Miryang
This stele was erected in 1912 to commemorate Bak Yang-chun (1561-1631) for the filial devotion that he demonstrat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The pavilion housing the stele was built at the same time.
Bak Yang-chun lost his father at a young age. Every morning and evening, he traveled the 12 km between his house to his father’s tomb to greet his father, while diligently looking after his mother during the day. Amidst the Japanese invasions, both his mother and grandmother died, and instead of seeking refuge, he remained by their coffins, crying in mourning. It is said that when Japanese troops arrived at the village, the commander could not help but admire Bak’s devotion and decided not to rade the village, instead erecting at its entrance a marker reading “a devoted son sent by the heaven.”
Later, a commemorative pavilion was built here in Bak’s honor, but it eventually burned down. The current stele and pavilion were built in 1912 by the local Confucian community.
The stele consists of a tortoise-shaped pedestal, a rectangular body stone, and a capstone engraved with dragon designs.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효행으로 이름을 날린 박양춘(1561-1631)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12년에 세워졌다. 비각도 이때 함께 세워졌다.
박양춘은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에서 약 12km 떨어진 무덤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걸어가 인사를 올렸다. 낮에는 어머니를 모시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어머니와 할머니가 함께 돌아가시자 피난을 가는 대신 밤낮으로 슬피 울며 관을 지키고 상을 치렀다. 이 모습을 본 왜군 장수가 감탄하며 마을 입구에 ‘하늘에서 내린 효자’라는 표지를 세우고 마을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고을에서 박양춘의 효행을 기려 정려각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불에 타 없어졌다. 지금의 비석과 비각은 1912년 밀양 지역 유림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사각형의 몸돌, 용무늬를 새긴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자료
- 밀양 박양춘 여표비각, 경상남도 문화재DB, 경남관광 길잡이 문화재정보, https://www.gyeongnam.go.kr/index.gyeong?menuCd=DOM_000009404005001000&no=1000&page_no=98&reurl=DOM_000009404005000000 -> 모헌(慕軒) 박양춘(朴陽春, 1561~1631)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이다. 박양춘은 효행으로 호조참의에 제수된 성재 박항朴恒의 아들이다. 모헌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 장례 후 밤에는 시묘를 하고 낮에는 조모와 모친을 봉양하였다. 모헌의 효성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부친상을 당하여 묘를 지키는데 어느 날 폭우가 쏟아져 불어난 물로 인해 냇물을 건너 모친을 봉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박양춘이 크게 울부짖자 냇물이 멈추어 무사히 모친을 봉양하였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중에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조모와 모친이 함께 돌아가시자 왜군의 침입과 상관없이 밤낮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이곳을 지나가던 왜장 이시다(石田三成)이 그의 효심에 감복하여 “출천지효(出天之孝, 하늘에서 내린 효자)” 라는 글씨를 써서 마을 입구에 정표하여 뒤따르는 왜병으로부터의 침범을 막아주었는데, 이것이 여표비의 유래가 되었다 한다. 이후 고을에서 후대의 교훈을 삼고자 정려각을 그 주변에 세웠고 정조 때에는 삼강록에 실렸으며 박항은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후 정려각이 퇴락되자 1912년도에 박양춘을 추모하는 밀양의 재지사족들에 의해 지금의 여포비와 비각이 건립되었다. 비의 받침인 부좌(趺坐)는 거북이의 형상을 한 귀부형(龜趺型)이며 개석은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놓고 싸우는 이수형(首型)이다. 비신(碑身) 앞면에는 ‘모헌박선생여표유허비병서(慕軒朴先生閭表遺墟碑幷序)’라고 음각되어 있다. 비문은 김도화가 지었고 글씨는 안종석이 새겼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공포양식은 삼익공 양식이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단청하여 마감하였다. 그리고 비각주변을 한식 담장으로 두르고 정면에 출입문인 협문을 달았다.
- 박양춘여표비각, 두산백과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8365 -> 박양춘(1561∼1631)은 조선 명조 때 효행으로 호조참판에 제수된 성재(惺齋) 박항(朴恒)의 아들이다. 양춘이 부친상을 당하여 묘를 지키는데 하루는 폭우가 쏟아져 강을 건너 어머니를 만나러 가지 못하게 되어 울부짖자 강류(江流)가 중단되는 일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도 조모와 모친상을 당하여 밤낮 관곽(官廓)을 지키며 왜적을 피하지 않고 호곡하는 그의 효에 감복한 왜장(倭將)이 무사하도록 화를 막아준 일화도 있다. 그 왜장이 <출천지효(出天之孝)>라는 문자를 써서 정표(旌表)한 것이 이 여표비의 시초이다. 그후 마을 사람들이 중수하고 관리해 왔으나 불탔다. 1912년 손익현(孫翼鉉), 조세모(曺世模), 이후성(李厚性), 이병희(李炳熹) 등의 사림들이 그 사적을 기념하기 위해 여표비를 건립하고 비각을 세웠다. 비석의 제액은 <모헌박선생여표유허비명병서(慕軒朴先生閭表遺墟碑銘幷序)>라 하였고, 비문은 김도화(金道和)가 지었고 글씨는 안종석(安鍾奭)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