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금시당 백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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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금시당 백곡재
Geumsidang Hall and Baekgokjae Ritual House, Miryang
밀양 금시당 백곡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밀양 금시당 백곡재
영문명칭 Geumsidang Hall and Baekgokjae Ritual House, Miryang
한자 密陽 今是堂 栢谷齋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로 24-183 (활성동)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8호
지정(등록)일 1996년 3월 11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당
수량/면적 2동
웹사이트 밀양 금시당 백곡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2020

금시당은 조선 명종 때 부승지를 지낸 금시당 이광진(李光軫․1513~1566)이 1566년에 지은 별장이다. 백곡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금시당을 복원한 백곡 이지운(李之運․1681~1763)을 추모하기 위해 1860년에 세운 재사(齋舍)*이다.

이광진은 《중종실록》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밀양강이 굽이치는 언덕 위에 금시당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금시’는 ‘지금이 옳다’는 뜻으로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그른 줄을 깨달았다)’에서 따왔다. 금시당은 그의 호(號)이기도 하다.

금시당은 5대손 이지운이 150년 뒤인 1744년 복원했으며, 1866년 크게 고쳐지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됐다.

백곡재는 금시당 동쪽 축대 위에 들어섰다. 건축 규모나 양식은 금시당과 거의 같고 온돌방과 마루만 반대로 배치돼 있다. 두 건물 모두 조선시대 후기 영남지방 양반 가문의 전형적인 정자 건물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광진이 정원에 심은 은행나무는 밀양시 보호수이다.


  • 재사: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나 사당 인근에 지은 집

2023

금시당은 조선 명종 때의 문신 금시당 이광진(李光軫)이 지은 별서*이다. 이광진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 밀양강이 굽이치는 언덕 위에 금시당을 짓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금사당 정원에는 이광진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남아 있는데, 현재 밀양시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금시당(今是堂)이라는 이름은 이광진의 호이기도 한데, ‘지금(今)이 옳다(是)’라는 뜻을 담고 있는 ‘금시(今是)’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인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그른 줄을 깨달았다)’에서 따온 말이다.

1566년에 별서를 처음 지은 이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1744년에 이광진의 5대손 백곡 이지운(李之運)이 복원하였다. 이후 1867년에 크게 고쳐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4칸, 옆면 2칸에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곡재는 금시당 동쪽에 위치한 서재 건물이다. 금시당을 복원한 이지운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인 백곡(栢谷)을 이름으로 삼아 1860년에 지었다. 건축 규모나 양식은 금시당과 거의 같은데, 온돌방과 마루만 반대로 배치하였다.

두 건물 모두 조선 후기 영남지방 양반 가문의 건축물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 별서(別墅):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

영문

  • Geumsidang Hall and Baekgokjae Ritual House, Miryang

2020

Geumsidang Hall is a villa first built in 1566 by Yi Gwang-jin (1513-1566, pen name: Geumsidang),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Yi Gwang-jin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46 and took part in the writing of the Annals of King Jungjong (r. 1506-1544) and King Injong (r. 1544-1545). He lived as a government official until his retirement in 1565. After retirement, he returned to his hometown where he built Geumsidang Hall and dedicated his life to studying. Geumsidang means “hall of the now,” and comes from a verse by the Chinese poet Tao Yuanming (365-427) that says "It is only now that I realize my past mistakes.” After Yi Gwang-jin died, his son used this villa as a lecture hall to educate student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the villa was destroyed. In 1744, a new villa was built by Yi’s descendant Yi Ji-un (1681-1763, pen name: Baekgok) and was renovated in 1866. The villa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on the left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on the right.

Baekgokjae Ritual House is situated east of the Geumsidang Hall. It was built in 1860 to honor Yi Ji-un. Its layout and size is similar to Geumsidang Hall. The ginkgo tree in front of the house is presumed to have been planted personally by Yi Ji-un. It is designated as a protected tree of Miryang City.

2023

Geumsidang Hall is a villa established in 1566 by Yi Gwang-jin (1513-1566, pen name: Geumsidang),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Born in Miryang, Yi Gwang-jin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46 and served in various official posts. After his retirement in 1565, Yi returned to his hometown and built Geumsidang Hall on a hill near the Miryanggang River, where he spent the remainder of his life. The name Geumsidang means “Hall of the Proper Now,” and comes from a verse in Ode on Returning Home (Guiqu laici) by the Chinese poet Tao Yuanming (365-427) that reads, “I realized that the present is right and the past is wrong.”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the original building burnt down. In 1744, the villa was built anew by Yi Gwang-jin’s fifth-generation descendant, Yi Ji-un (1681-1763, pen name: Baekgok). In 1867, it underwent a major renovation. The building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The ginkgo tree in the garden is presumed to have been personally planted by Yi Gwang-jin and is designated as a protected tree of Miryang.

Baekgokjae Ritual House was built in 1860 to the east of Geumsidang Hall to honor Yi Ji-un. The size and architectural style of the two buildings are similar, and their layouts mirror one another.

영문 해설 내용

2020

금시당은 조선시대의 문신 이광진(1513-1566, 호: 금시당)이 1566년에 지은 별장이다.

이광진은 1546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65년까지 관직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금시당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금시'는 '지금이 옳다'는 뜻이며, 중국 시인 도연명의 시 중 “이제야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광진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이 후진 양성을 위한 강학소로 이용하였다.

금시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744년에 후손 이지운(1681-1763, 호: 백곡)이 다시 지었고, 1866년에 크게 고쳐지었다. 왼쪽의 대청과 오른쪽의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시당 동쪽에 있는 백곡재는 이지운을 기리기 위해 1860년에 세운 재사이다. 건물의 규모나 양식은 금시당과 비슷하다. 백곡재 앞에 있는 은행나무는 이광진이 직접 심었다고 하며, 밀양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2023

금시당은 조선시대의 문신 이광진(1513-1566, 호: 금시당)이 1566년에 지은 별서이다.

밀양 출신인 이광진은 1546년 과거에 급제하여 1565년까지 여러 관직을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밀양강이 굽이치는 언덕 위에 금시당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금시당이라는 이름은 “지금이 옳다”는 뜻으로,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그른 줄을 깨달았다”라는 시구에서 따온 말이다.

금시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1744년에 이광진의 5대손 이지운(1681-1763, 호: 백곡)이 다시 지었고, 1867년에 크게 고쳐 지었다. 건물은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원에는 이광진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남아 있는데, 현재 밀양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백곡재는 이지운을 기리기 위해 1860년 금시당 동쪽에 지어졌다. 건축 규모나 양식은 금시당과 거의 같은데, 온돌방과 마루의 위치만 반대로 배치하였다.

참고자료

  • (류혜숙의 여행 스케치) 경남 밀양 금시당·백곡재, 영남일보, 2017.12.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71208.010360819050001 -> 금시당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영조 때인 1744년에 이광진의 5세손인 백곡(栢谷) 이지운(李之運)이 복원했다. 이지운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소학을 중심으로 많은 후진을 양성했던 학자로 이곳에서 문중의 유고와 실기를 모아 철감록(感錄)을 편찬했다. 훗날 문중에서는 철감록에 실린 이행의 글과 자료를 따로 모아 기우집(騎牛集)을 발행했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두문동 72명의 명단을 확정했다고 한다. 이후 1867년 선생의 10세손 무릉옹(武陵翁) 이종원(李鍾元)과 11세손 만성(晩醒) 이용구(李龍九)가 문중의 뜻을 모아 원래 건물을 해체한 뒤 크게 중수한 것이 현재의 금시당 건물이다. 현판이 대청 안에 걸려 있다.
  • 필림,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tjfdkrtks418/222015957388 -> 경내에는 금시당, 백곡재 두 주 건물 외에도 관리사 및 정문, 중문, 남문등 별도의 건물이 있다. / 1800년(정조24년) 동쪽 위편에 터를 잡아 백곡사(栢谷祠)를 세워 기우 이행과 월연 이태, 금시당 이광진, 근재 이경홍등 여주 이씨 명현들을 향사하였는데 이후 세덕사(世德祠),백곡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