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계 신의련 유적비
미계 신의련 유적비 Stele of Sin Ui-rye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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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미계 신의련 유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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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of Sin Ui-ryeon |
한자 | 美溪 愼義連 遺蹟碑 |
지정(등록) 종목 |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
시대 | 1907년 |
목차
해설문
국문
2022
미계 신의련(1581~?)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1907년 백운면 노촌리 원노촌 마을 어귀에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사당인 충효사와 누정 영모정은 1856년(철종 7)에 후손 신영구가 지었다. 미계 신의련 유적비는 신의련을 제향한 충효사, 신의련의 효성을 기념한 신의련 효자각 등과 함께 거창 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진안지』에 의하면 신의련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병든 아버지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에도 병든 아버지 곁에서 간호하고 있었는데, 왜적들이 쳐들어와 아버지를 죽이려 하였다. 신의련은 몸으로 막고 울면서 “나는 죽어도 좋으니 병든 노친만은 살려 달라.”라고 애원했다.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신의련의 이름을 물은 뒤 그 이름을 종이에 써서 태우니 종이가 타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놀란 왜장이 동네 어귀에 ‘효자가 사는 곳’이라는 방을 세워 왜적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이곳으로 피난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5만 명에 달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을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유적비 앞면에는 “미계 신선생 의련 유적비(美溪 愼先生 義連 遺蹟碑)”라고 새겨 있고, 뒷면에는 후손 신기선이 지은 명(銘)이 있다. 비석은 받침돌, 몸체, 지붕돌로 이루어졌다. 비석 몸체는 높이 180㎝, 폭 59㎝, 두께 34㎝이다.
2023
미계 신의련 유적비는 1907년에 신의련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친을 죽이려 하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빌었다. 이러한 신의련의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마을 입구에 방을 붙여 이곳은 효자가 사는 곳이라 하여 왜군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신의련에게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1801년에 효자각이 세워졌다.
신의련 유적비는 받침돌인 비대석, 비석의 몸체인 비신, 덮개돌인 가첨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미계 신선생 유적비(美溪愼先生遺蹟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신의련의 효행에 관련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 가첨석: 빗돌이나 석등 따위를 세운 다음 그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
영문
Stele of Sin Ui-ryeon
2022
This stele was erected in 1907 to commemorate the filial devotion of Sin Ui-ryeon (1581-1606) of the Gochang Sin Clan. Wonnochon Village in Nochon-ri, where the stele is located, has been home to many generations of this clan.
Sin Ui-ryeon was known for his filial devotion from an early age and took care of his ill father with the utmost attentio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he was looking after his father when Japanese soldiers broke into their house. The soldiers were about to kill his father, so Sin stood in front of his father, begging them to spare his father’s life and kill him instead. A Japanese commander, moved by Sin’s filial devotion, asked for his name, wrote it down on a piece of paper, and tried to set it on fire. But instead of burning, the piece of paper flew up into the sky. Startled by what he had witnessed, the Japanese commander wrote at the entrance to the village the words “Village of a Filial Son” and prohibited troops from entering the village. It is said that about fifty thousand people escaped death during the invasions by fleeing to this village, which is why this area is known as Omandong, meaning “Neighborhood of the Fifty Thousand.”
The stele consists of a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body stone measures 180 cm in height, 59 cm in width, and 34 cm in thickness. The name of the stele is inscribed down the front, while the text, composed by Sin Ui-ryeon’s descendant Sin Gi-seon, is inscribed on the back.
Next to the stele is a pavilion built in 1801, which holds a plaque issued by the central government to commemorate Sin Ui-ryeon’s filial devotion. Elsewhere in Nochon-ri are Chunghyosa Shrine and Yeongmojeong Pavilion, which were built to honor Sin Ui-ryeon.
2023
This stele was erected in 1907 to commemorate the filial devotion of Sin Ui-ryeon (1581-1606).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Sin’s father was caught and about to be killed by Japanese soldiers when Sin begged them to spare his father’s life and kill him instead. Moved by Sin’s filial devotion, a Japanese commander wrote at the entrance to the village the words “Village of a Filial Son” and prohibited troops from entering it.
The stele consists of a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name of the stele is inscribed down the front, while a text recording Sin Ui-ryeon’s virtuous deed is inscribed on the back. Next to the stele is a pavilion built in 1801, which holds a plaque issued by the central government to commemorate Sin Ui-ryeon’s filial devotion.
영문 해설 내용
2022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효자인 신의련(1581-1606)을 기리기 위해 1907년에 세워졌다. 비석이 세워진 노촌리 원노촌마을은 거창신씨가 대대로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신의련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깊어 병든 아버지를 지극히 모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아버지를 간호하고 있었는데, 왜적들이 쳐들어와 아버지를 죽이려 하자 몸으로 막고 울면서 “나는 죽어도 좋으니 아버지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신의련의 이름을 물은 뒤 그 이름을 종이에 써서 태우니 종이가 타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놀란 왜장이 마을 입구에 ‘효자가 사는 곳’이라 써서 붙이고 왜적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마을로 피난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5만 명에 달했다고 하며, 동네 이름을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석은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은 높이 180㎝, 폭 59㎝, 두께 34㎝이다. 비석 앞면에는 비석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후손 신기선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석 옆에는 1801년에 세워진 효자각이 있으며, 효자각에는 신의련의 효행을 기려 조정에서 내린 정려가 모셔져 있다. 이밖에도 노촌리에는 신의련의 위패를 모신 충효사와 신의련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인 영모정이 있다.
2023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효자인 신의련(1581-1606)을 기리기 위해 1907년에 세워졌다. 신의련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친을 죽이려 하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빌었다. 이러한 신의련의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마을 입구에 ‘효자가 사는 곳’이라 써서 붙이고 왜군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비석은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 앞면에는 비석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신의련의 효행에 관련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비석 옆에는 1801년에 세워진 효자각이 있으며, 효자각에는 신의련의 효행을 기려 조정에서 내린 정려가 모셔져 있다.
- 2023.07. 피드백 내용 - 전체적으로 길이 줄임. 그리고 비문을 후손이 지었다는 정보는 오류라는 지적이 있어 삭제함.
참고자료
- 신의련, 디지털진안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jinan/toc/GC05801035
- 미계 신의련 유적비, 디지털진안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jinan/toc/GC05801847
- 신의련 효자각, 디지털진안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jinan/toc/GC05800800
- 충효사, 디지털진안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jinan/toc/GC05801386
- 영모정, 디지털진안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jinan/toc/GC05800759
- 노촌리 원노촌 거창 신씨 집성촌, 디지털진안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jinan/toc/GC0580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