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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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서원
Maesanseowon Confucian Academy
대표명칭 매산서원
영문명칭 Maesanseowon Confucian Academy
한자 梅山書院
주소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능서로 94-8
지정(등록) 종목 향토유적 제10호



해설문

국문

문익점은 1363년(공민왕 12) 고려 조정이 원나라에 보낸 사신단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가서 목면(木棉)을 만드는데 필요한 목화(木花)씨앗을 구해왔다.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인 강성현(江城縣: 현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목화재배에 성공하여 후일 의류문화와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 고려에서 전의주부(典儀主簿)·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였고, 조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다. 이후 1440년 (세종22) 영의정領議政과 부민후富民侯에 추봉追封되었고, 1456년(세조 2)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사우(祠宇)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그의 출생지인 강성현(江城縣)에 사우가 창건되었다.

문익점의 사당이 여주에 세워진 것은 현손(玄孫) 문치창(文致昌)이 1461년(세조 7) 여주에 은거한 뒤 별묘(別廟)를 세우고 “삼우사(三憂祠)”라고 현액(縣額)하면서 부터이다. 삼우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훼손되었다가 1711년(숙종 37)에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 13) 다시 후손들이 재물을 모아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재차 훼손되어 여주 지역의 후손들과 여주군의 지원을 받아 현재 건물을 재건하였다. 이때 목은(牧隱)이색(李穡 1328~1396)을 함께 배향하면서 “매산서원”이라 현액하였으며, 1986년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어 문중 후손과 여주 유림에서 춘·추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동재와 서재, 강당이 있으며 강당 뒤 내삼문 안에는 문익점과 이색을 봉안한 사당에 “매산사(梅山祠)”란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에 매산서원 현판과 서원 봉건기(奉建記), 여러 기문(記文)등이 있어 매산서원의 연혁을 상고할 수 있다. 사당의 마당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향나무가 드리워져 있어 서원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영문

Maesanseowon Confucian Academy

A Confucian academy, called seowon in Korean, is a private education institution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at usually combined the functions of a Confucian shrine and a lecture hall.

Maesanseowon Confucian Academy was established in 1950 to honor Mun Ik-jeom (1329-1398) and Yi Saek (1328-1396), both civil officials and scholars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The academy was designated as Yeoju Local Cultural Heritage in 1986.

Mun Ik-jeom was born in Gangseong-hyeon Prefecture (today’s Sancheong).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60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 1363, he accompanied a state envoy to Yuan China. On his return to Korea, he brought cotton seeds with him, and became the first person in Korea to successfully cultivate cotton. In 1440,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he was posthumously promoted to chief state councilor, the highest position in the government.

Yi Saek was renowned for his steadfast loyalty to the Goryeo dynasty during the turbulent period between the reform of King Gongmin (r. 1351-1374)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Joseon dynasty, he refused the requests of its founding king, Taejo (r. 1392-1398), that he serve in the central government. Instead, he traveled around the country until his death at Silleuksa Temple in Yeoju.

The history of this academy goes back to 1461 when a descendant of Mun Ik-jeom settled in the Yeoju area and established a shrine named Samusa to commemorate his ancestor. The shrine was destroy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and was rebuilt in 1711 and 1862 by Mun’s descendants. However, the shrine was destroyed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and was rebuilt again as a Confucian academy in 1952. It was at this time that Yi Saek also began to be venerated here.

The complex consists of a main gate, two dormitories, a lecture hall, an inner gate, and a shrine. The Chinese juniper (Juniperus chinensis L.) standing in the main courtyard is designated as a protected tree of Yeoju City.

영문 해설 내용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매산서원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문익점(1329-1398)과 이색(1328-1396)을 기리는 서원이다. 1986년 여주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문익점은 오늘날의 산청 지역인 강성현 출신으로, 1360년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3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목화씨를 가져왔고, 한국에서 최초로 목화를 재배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440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색은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건국 후에는 조정에 머물라는 태조(재위 1392-1398)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전국을 유람하던 중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 생을 마쳤다.

매산서원은 1461년 문익점의 후손이 여주로 이주하면서 세운 삼우사라는 사당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삼우사는 임진왜란 때 훼손되었고 1711년에 중수하였다. 1862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훼손되었고, 1952년 지금의 서원을 다시 세웠다. 이때 이색을 함께 배향하였다.

서원은 외삼문,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강당, 내삼문,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당에 있는 향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자료

  1. 문치창은 문익점의 현손(증손자의 아들)이 아니라, 문익점의 증손임.
    • 남평문씨 대종회 족보 확인 결과 → 문익점 – 문중용 – 문승손 – 문치창
  2.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회산공(悔山公) 휘 치창(致昌) 유허비명 병서”
    • 문치창이 35세였던 세종 16년 갑인년(1434)에는 음보로 예문관 직강이 되고 병진년(1436)에는 강성에서 여주 별묘리로 이거하였는데, 지금 번매리이다. 공이 거기서 거(居)한 후 그 증조부 되신 충선공 삼우당 선생의 별묘(別廟)를 세우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전배를 드렸으므로 세상에서 동리 이름을 별묘로 부른 것이 이 때부터였는데 지금은 훼철되어 빈터만 있다.
  3. 매산서원의 내력에 대해 확인 필요. 위 자료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함.
    • 세조 때 경남 산청 지역에 삼우사 건립함.
    • 이색을 함께 모시고 서원으로 승격함.
    • 병자호란 때 후손 문겸(文謙)이 여주로 삼우사를 옮김.
    •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
    • 1952년 여주경찰서장에 취임한 후손 문광규(文光圭, 또는 문상규(文相圭))가 복원함.
    • 1987년 사당을 헐고 다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