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욱수동과 경산 옥산동 가마유적
대구 욱수동과 경산 옥산동 가마 유적 Kiln Site in Uksu-dong, Daegu and Oksan-dong, Gyeongs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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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대구 욱수동과 경산 옥산동 가마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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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Kiln Site in Uksu-dong, Daegu and Oksan-dong, Gyeongsan |
한자 | 大邱 旭水洞과 慶山 玉山洞 가마 遺蹟 |
해설문
국문
대구 욱수동과 경산 옥산동 가마 유적은 신라 시대 토기를 생산하던 가마 시설이 대량 확인된 곳으로 시지노인전문병원이 있는 구릉 일대에 주로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가마 외에도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 토기 가마와 관련된 구덩이, 폐기장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삼국시대의 석곽묘*와 석실묘**, 고려와 조선 시대의 토광묘***나 옹관묘**** 등 다양한 유구*****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에서 나온 유물은 토기와 도기, 금속류 등 2천여 점이 넘는다.
이 유적은 1998~2001년에 걸쳐 두 차례 발굴이 이루어졌다. 가마를 만든 모습을 통해 이 지역의 토기 생산과 유통을 추론해 볼 수 있어서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는 기원후 4세기 후반의 경질토기******가 가장 먼저 구워졌다. 이후 5세기 전반에는 유적의 중앙부에 2~3기의 가마를 나란히 세워 사용하였다. 이는 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가마를 효율적으로 사용,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세기 중·후반에는 가마가 급증하는데 이 시기는 시지 일대에 고분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많은 양의 토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5세기 후반에는 이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고안된 형태의 토기가 다량으로 생산되어 공급되기도 하였다. 6세기 전반이 되면 가마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토기 생산지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욱수동과 경산 옥산동 가마 유적은 이 일대 즉 대구 노변동, 욱수동, 시지동, 가천동, 경산 중산동 등의 고분에 넣는 토기를 공급하던 곳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당시 신라의 지방 소국 압독(압량)의 중심 세력이었으며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을 만들었던 집단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통제 아래 가마 축조 등을 기반으로 경제력을 키우고 취락 및 인구가 성장하였으며 대규모 고분군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에서 생산된 토기는 대구 복현동 고분군이나 불로동 고분군, 성주 명포리 고분군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당시의 경제적 유통이 아주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최근 이곳에서 가까운 경산 중산지구 유적에서도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와 삼국시대의 토기 가마, 고려와 조선 시대의 기와 가마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일대는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람들의 생산 활동과 마을 풍경, 고분 등 무덤 공간까지 어우러진 복합 유적으로 당대의 생활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곳으로 평가할 수 있다.
- 석곽묘(石槨墓): 지면을 깊게 파고 자갈 따위의 석재(石材)로 덧널을 만든 무덤
- 석실묘(石室墓): 돌로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려 봉토를 만든 무덤
- 토광묘(土壙墓):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직접 넣거나 목관이나 목곽에 시신을 넣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무덤.
- 옹관묘(甕棺墓): 큰 독이나 항아리 따위의 토기에 시신을 넣어 묻는 무덤
- 유구(遺構):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 경질토기(硬質土器): 900℃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내어 흡수성이 높고 단단한 질그릇.
영문
Kiln Site in Uksu-dong, Daegu and Oksan-dong, Gyeongsan
This archaeological site, spanning the areas of Uksu-dong in Daegu and Oksan-dong in Gyeongsan, includes the remains of 38 kilns used for the mass production of earthenware by the Silla kingdom (57 BCE-935 CE)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57 BCE-668 CE). A number of structural remains dating to the Bronze Age were also discovered at this site, including dwellings, waste pits, and kiln-related pits. Excavations also identified stone-lined tombs and stone chamber tombs dating to the Three Kingdoms period, as well as pit tombs and jar coffin tombs dating to the Goryeo (918-1392) and Joseon (1392-1910) periods. Over 2,200 artifacts were unearthed from this site, including earthenware, ceramics, and metalware.
Two excavations were conducted at the site between 1998 and 2001. The data collected provides valuable clues about the production and distribution of earthenware at the time. The earliest kilns at this site produced unglazed earthenware circa the late 4th century. In the early 5th century, two or three kilns were built in the central part of the site in close proximity to each other in order to facilitate their effective operation and maintenance for mass production. The site saw a significant increase in the number of kilns during the mid- to late 5th century. They were built to meet the surging demand for burial goods, as the number of tombs built in the area dramatically increased during this period. It was confirmed that during the late 5th century, large-scale production of independently designed earthenware took place at this site. It is presumed that the site gradually went out of use in the early 6th century, when the number of kilns suddenly declines.
It is thought that the earthenware produced at this site was used in the tombs made in the areas of today’s Nobyeon-dong, Uksu-dong, Siji-dong, and Gacheon-dong in Daegu, as well as Jungsan-dong in Gyeongsan. This area was the center of power for the small Silla’s statelet of Apdok (or Amnyang). It is presumed that the Ancient Tombs in Imdang-dong and Joyeong-dong of Gyeongsan belonged to a community ruled by Apdok. In other words, it is presumed that through the operation of these kilns, the economic power increased, resulting in the growth of the settlement size and population, which in turn allowed for the creation of large scale burial tomb sites.
The earthenware produced at this site was found in the ancient tombs in Bokhyeon-dong and Bullo-dong in Daegu, as well as in Myeongpo-ri in Seongju, showing the dynamic distribution of these kilns’ earthenware at the time.
At the nearby archaeological site in the Jungsan District of Gyeongsan, other remains were found, such as Bronze Age dwellings, Three Kingdoms-period earthenware kilns, and Goryeo- and Joseon-period roof tile kilns. This shows that the overall area is a complex archaeological site with production areas, dwelling areas, and burial areas dating from the Bronze Age to the Joseon period, making it an important archaeological site through which the lifestyle of the time can be understood.
영문 해설 내용
대구 욱수동과 경산 옥산동 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이 유적은 신라시대에 토기를 생산하던 38기의 가마 유구가 발견된 곳이다. 이 일대에서는 가마 외에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토기 가마와 관련이 있는 구덩이, 폐기장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삼국시대의 석곽묘와 석실묘, 고려와 조선시대의 토광묘나 옹관묘 등 다양한 유구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에서 나온 유물은 토기와 도기, 금속류 등 2,200여 점에 이른다.
이 유적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두 차례 발굴되었다. 조사를 통해 발견된 가마의 형태를 통해, 이곳의 토기 생산과 유통 등을 추론할 수 있어서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곳의 가마에서는 4세기 후반 무렵 경질토기가 가장 먼저 구워졌다. 이후 5세기 전반에는 유적의 중앙부에 2~3기의 가마를 나란히 세워 사용하였다. 이는 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가마를 효율적으로 사용, 관리하기 위한 형태였다. 5세기 중·후반에는 가마의 수가 급증하였다. 이는 이 일대에 조성되는 무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부장품으로 사용할 토기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5세기 후반에는 자체적으로 고안된 형태의 토기가 다량으로 생산되기도 하였다. 6세기 전반부터는 가마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토기 생산지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가마는 지금의 대구 노변동, 욱수동, 시지동, 가천동, 경산 중산동 등의 지역에 조성된 고분에 매장된 토기를 공급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지역은 당시 신라의 지방 소국 압독(압량)의 중심 세력이었으며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을 만들었던 집단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가마 운영을 통해 경제력이 높아지면서, 이 지역의 취락 규모 및 인구가 성장하였으며, 대규모 고분군도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유적에서 생산된 토기는 대구 복현동 고분군이나 불로동 고분군, 성주 명포리 고분군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당시의 유통이 아주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곳에서 가까운 경산 중산지구 유적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삼국시대의 토기 가마,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와 가마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일대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람들의 생산 활동 구역, 마을, 고분 등이 어우러진 복합 유적으로, 당시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