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하목정
달성 하목정 Hamokjeong Pavilion, Dals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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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달성 하목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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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amokjeong Pavilion, Dalseong |
한자 | 達城 霞鶩亭 |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목정길 56-10 (하산리) |
지정(등록) 종목 | 보물 제2053호 |
지정(등록)일 | 2019년 12월 3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달성 하목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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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 이종문(洛捕 李宗文)이 선조 37년(1604)에 세운 것으로, 원래는 주택의 사랑채였으나 안채가 없어진 후 정자로 사용하고 있다.
'하목정'이라는 명칭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이종문의 장남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부연(附椽)*을 달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인조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의 넓은 대청에 4칸의 방을 세로로 덧붙여 평면이 정자형(丁字形)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의 양쪽 추녀를 조금씩 잘라 처마 끝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방구매기 수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적이며, 건물의 구성수법이 조선중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김명석, 남용익 등 유명 인사들이 쓴 시(詩)가 걸려있다.
- 부연(附椽) : 겹처마에서 서까래 끝에 거는 짧고 사각단면인 서까래
영문
Hamokjeong Pavilion, Dalseong
This pavilion was built in 1604 by Yi Jong-mun (1556-1638), a civilian army leader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958, to be used as the men’s quarters of a larger residence that consisted of various buildings. After the house’s women’s quarters area burnt down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2), the men’s quarters came to be used as a pavilion. A building has since been rebuilt on the site of the former women’s quarters. There is also a family shrine behind the women’s quarters.
It is said that King Injo (b. 1595, r. 1623-1649)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visited here before he ascended the throne. He later bestowed Yi Jong-mun’s son, the civil official Yi Ji-yeong (1585-1639), some money from his private fund to repair this house. The king also calligraphed the name of this pavilion, so that it could be carved onto a wooden plaque and hung at the front of the building. This name Hamokjeong means “pavilion of the sunset and ibis” and comes from a poem by Wang Bo (649-676) of Tang China that reads, “A lonely ibis flies neatly across the setting sun; The autumn water and distant sky blend together as one color.” Hung on the walls inside the pavilion are poems written by scholars who visited here.
The building has a sideways T-shaped layout consisting of a spacious wooden-floored hall that is perpendicular to underfloor-heated rooms. The roof features double-tiered eaves, which was formally reserved only for royal buildings or Buddhist temples, so it is rare to see in an upper-class house. There is also a square pond in front of the pavilion.
영문 해설 내용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이종문(1566~1638)이 사랑방으로 사용하고자 1604년에 세운 것이다. 한국전쟁 때 안채가 화재로 소실된 이후 이 사랑채는 정자로 사용되었다. 안채가 있던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었다. 그 뒤에는 가족 사당이 있다.
인조(재위 1623-1649)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을 방문했던 것을 계기로, 왕이 된 후 관직에 오른 이종문의 아들 이지영(1585-1639)에게 자신의 사비를 하사하여 집을 수리하게 해주었고, ‘하목정’의 현판도 친필로 써서 하사했다고 전한다. 건물의 이름 하목정은 “노을과 따오기”를 의미하는데, 당나라 시인 왕발(649-676)의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 /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라는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대청에는 이곳을 방문했던 문인들이 남긴 시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구조는 옆으로 누운 ‘T’자형의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된다. 이 건물의 지붕은 겹처마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지붕은 사찰이나 궁궐 등에서나 쓸 수 있던 건축방식으로, 상류층 가옥에서 보기는 힘들다. 건물 앞에는 사각형의 연못 자리가 남아있다.
참고자료
- 국가문화유산포털 설명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2220530000&pageNo=1_1_1_1 ->건물의 용도를 주인과 하인이 같은 건물에 거주하는 것도 매우 이례적이며, 또한 공적 목적이 큰 커다란 사랑대청을 가지면서도 사랑윗방 앞에 개인적인 공간인 누마루를 설치한 것은 조선 중·후기 별당건축의 한 예를 보여줌. / 일반적인 와가는 지붕의 모습을 날렵하게 보이기 위하여 처마 모서리를 뾰족하게 하는 것이 통상적인데, 하목정은 초가지붕의 모습과 같이 둥글게 만든 방구매기수법을 사용함. 이러한 수법은 청도 선암서원(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 정도에서나 볼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처마구성 방식임.
- 2019년도 제13차 문화재위원회 건축문화재분과 회의록
- -> 하목정 건립 시기는 1604년보다 앞선 1599년으로 봐야 한다. (하목정을 건립한 시기는 달성 하목정 보물 승격 지정자료보고서 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자료에 1604년(선조 37)으로 보고 있으나 이 점은 재고가 필요하다. 구본욱이 쓴 낙포 이종문의 생애와 하목정 (조선사연구26, 2017)을 보면, 이종문은 임진왜란 이전에 낙동강 동편에 서재를 마련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서실을 중건하고 하목정으로 편액하였다. 시기를 1599년(선조 32)으로 추측하는 것은 이종문의 아들인 이지영과 지화 형제가 1598년 2월 7일~1599년 1월 29일까지 하빈의 죽곡(竹谷)에 거주한 것(정경운, 고대일록하, 태학사, 2009, 18쪽, 68쪽)을 근거로 삼았다.)
- -> 하목정에는 인조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능양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621년에서 반정이 일어난 1623년 3월 사이에 하목정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이지영과 지화 형제는 이 무렵 조정이 혼란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고향에 돌아와 있다가 인조반정 이후 출사를 했다. 인조가 하목정의 위치가 매우 좋다는 평과 함께 정자에 부연을 달지 않은 이유를 묻자 사서인의 사가에 감히 할 수가 없다는 이지영의 대답이 뒤따랐다. 인조는 정자는 사가와 다르니 수리하여 부연을 달기를 말하면서 내탕금 은200냥을 내려 고쳐 달게 하였다. 이지영이 임금의 말씀이 여기에 이르시니 이후 사사로이 거주하지 않겠다고 하자 인조는 거하는 것을 폐하지 말되 그 행적을 표시하면 될 것이라 하고, 하목당 세 글자를 써서 내리고 문미에 달도록 했다.
- 겨울섬, 개인 블로그 https://gotn.tistory.com/629 -> 지붕처리방식 등 쉽게 설명한 편. / ‘안채’ 사진
- Culture & History Traveling, 개인 블로그 http://www.dapsa.kr/blog/?p=43871 -> 안채 복원 시점 언급
- (정자) 89. 달성 하목정(霞鶩亭), 2017.10.26.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7755 ->하목정은 1604년(선조 37년) 전의 이씨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 1566~ 미상)이 지었다. 1588년(선조 21) 생원에 합격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사원, 손처눌등과 함께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서면 대장(西面大將)으로 활약했다. 초유사 김성일의 표창을 받고 추천으로 세 고을의 수령이 됐다. 정유재란 때도 팔을 걷고 나섰다.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켜 원종공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됐다. 노후에 하목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하목정 이름은 초당사걸로 오언절구에 뛰어났던 당나라 시인 왕발의 ‘등왕각서 滕王閣序’ 중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落霞與孤鶩齊飛)/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秋水共長天一 色)’라는 시구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