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구산동 고분군 2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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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구산동 고분군 2호분
Goto.png 종합안내판: 김해 구산동 고분군



해설문

국문

김해 구산동 고분군 2호분은 수로왕비릉에서 동북쪽으로 100∼200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삼산리(三山里) 고분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7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크기는 김해 구산동 고분군 1호분보다 약간 작다.

무덤의 내부는 무덤 주인과 껴묻거리를 안치한 돌방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무덤은 뚜껑돌이 지면에 드러나 있으며 한쪽에 벽이 무너져 있었으나 근래에 흙을 덮어 정비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간단한 조사를 한 결과 돌방에서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구산동 고분군은 금관가야 멸망 후에 남아 있던 왕족의 무덤 또는 신라 지배층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무덤 형식이 가야 계통에서 신라 계통으로 바뀌는 모습은 김해 지역이 가야에서 신라로 바뀌던 시기의 중요한 역사적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영문

Tomb No. 2

This tomb is presumed to date to the 7th century or later. It likely belonged to a member of the Geumgwan Gaya royal family who remained in the Gimhae area after Geumgwan Gaya was annexed in 532 by the Silla kingdom (57 BCE-935 CE) or to a member of the Silla ruling class.

The tomb consists of a stone chamber and a corridor. The capstones which enclose the chamber had become exposed above ground and one of the walls had collapsed, but these were repaired and re-covered with soil.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an archeological survey of the tomb took place, during which roof tiles were excavated from the stone chamber.

영문 해설 내용

2호분은 7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532년 금관가야가 멸망한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던 금관가야 왕족 혹은 신라 지배층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은 무덤 주인이 묻힌 돌방과 무덤 외부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는 구조이다. 이 무덤은 뚜껑돌이 지면에 드러나 있고 한쪽 벽이 무너져 있었으나, 흙을 덮어 정비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간단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돌방에서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