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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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Stone Sakyamuni Buddha Triad at Daeungjeon Hall of Bonggoksa Temple, Gimcheon
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영문명칭 Stone Sakyamuni Buddha Triad at Daeungjeon Hall of Bonggoksa Temple, Gimcheon
한자 金泉 鳳谷寺 大雄殿 石造釋迦如來三尊像
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882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4호
지정(등록)일 2008년 4월 28일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괄
웹사이트 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봉곡사의 중심 전각인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석가여래삼존상은 본존*인 석가여래와 협시*인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삼존상의 제작 내력에 대해 기록한 『불상조성도금사적기(佛像造成塗金事蹟記)』가 석가여래상 내부에서 발견되어, 삼존상과 함께 2008년에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사적기에 따르면 이 삼존상은 조선 현종 11년(1670)에 승려 조각가인 삼응(三應) 등이 조성했다. 경상도 지역에서 많이 나는 희고 무른 재질의 불석으로 형태를 만든 후 위에 금을 덧입혔는데, 17세기 후반의 불상들이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볼 때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가운데에 앉아 있는 석가여래상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두었다. 이러한 손 모양은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양옆의 두 보살은 모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전체적인 형태와 자세가 매우 비슷하며 손의 방향만 반대로 되어 있다.

  • 본존(本尊): 법당에 모신 부처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부처.
  • 협시(脇侍): 부처를 좌우에서 모시는 두 보살


영문

Stone Sakyamuni Buddha Triad at Daeungjeon Hall of Bonggoksa Temple, Gimcheon

This Buddhist triad enshrined in Daeungjeon Hall consists of Sakyamuni (the Historical Buddha) flanked by Maitreya (the Buddha of the Future) and Dipankara (the Buddha of the Past). The triad was made in 1670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monk artisan Sameung.

The statues are made of zeolite, a soft whitish rock abundant in the Gyeongsang-do region, and have been gilded. It is a rare example of a 17th-century stone triad, as Buddhist statues were predominantly made out of wood at the time.

Sakyamuni’s right hand reaches down toward the ground and his left hand rests on his lap, indicating his defeat of worldly desires and his attainment of spiritual enlightenment. The two attendant bodhisattvas wear elaborately adorned headdresses. Their overall appearance is very similar apart from their mirrored hand gestures.

The triad was designated as a Gyeongsangbuk-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in 2008 after a record describing its creation process was discovered inside the statue of Sakyamuni.

영문 해설 내용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삼존상은 석가여래와 협시인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1670년에 승려 조각가인 삼응 등이 만들었다.

이 삼존상은 경상도 지역에서 많이 나는 희고 무른 재질의 불석으로 형태를 만든 후 위에 금을 덧입혔다. 17세기 후반의 불상들이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볼 때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석가여래상의 오른손은 땅을 향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두었다. 이러한 손 모양은 부처가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한다. 양옆의 두 보살은 모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전체적인 형태와 자세가 매우 비슷하며 손의 방향만 반대로 되어 있다.

석가여래상 내부에서는 이 삼존상의 제작 내력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어, 삼존상과 함께 2008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자료

  • 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김천의 문화재』, 50쪽. (김천시청 제공 자료)
  • 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298 → 석조여래상 내부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제작시기, 발원자, 제작에 관여한 사람 등이 기록되었다. 즉 1670년 3월 18일에 불사를 시작하여 4월 그믐날에 완성하였고 조각승은 수화원이 삼응이고 차화승이 학종(學宗)이다. 조각승 삼응은 1651년에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819호) 조성에 승일(勝日)의 보조화승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이후 삼응은 승일이 수화승으로 1665년에 칠곡 송림사 석조삼장보살좌상, 1668년에 김천 직지사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조성에 줄곧 참여하였다. 이들 작품 중 김천 직지사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과 얼굴 표현이나 신체 비례가 매우 유사하다. /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은 1670년에 조각승 삼응이 제작한 기록이 명확하며 삼응이 수조각승이 되어 제작한 유일한 작품으로도 의의가 있다. 더욱이 삼응은 승일 계파의 중요한 조각승으로, 승일파 조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불석제 불상의 하나로 조선 후기 불상 재료 연구에도 중요하다.
  • 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gimcheon.grandculture.net/gimcheon/toc/GC03201912 → 불상 3구와 복장물(腹藏物) 1책(冊)을 일괄하여 2008년 4월 2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4호로 지정되었다.
  • [김천] 봉곡사, 낭만적 이데아, 네이버 블로그, 2019.11.30. https://blog.naver.com/pjk3108/221723288686 → 봉곡사 전경, 개별 불상 사진
  • 봉곡사, 직지사 사찰안내 – 말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 홈페이지. http://www.jikjisa.or.kr/bbs/board.php?bo_table=107020&wr_id=39 → 봉곡사는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 2리 882에 위치하고 있다. 사전(寺傳)하는 봉곡사중수사적비명(鳳谷寺重修事蹟碑銘)(1698년,靈休 撰)에 의하면 그 개창이 신라 고찰이라 하였다. 즉, 신라시대 자장 대덕(慈藏大德) 이 도량을 개기(開基) 하고 이어서 고려초 도선 국사가 중수했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휴 대사에 의하여 기록된봉곡사사적(1685년)에는, 동상실(東上室) 화재시(1717년) 습득한 상량문을 인용하여 고려 태조 천수(天授) 5년(922) 도선 국사의 개창이라 하였으므로 그 개기(開基) 에 혼란이 있다. 그러나 영휴 대사는 사적을 편찬하고 나서 13년 후 사승(寺僧) 현윤 대사(玄胤大師) 의 간청으로 사적기를 다시 재록(再錄) 하면서 자장 법사 당시의 개창으로 규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사적을 의지한다면 봉곡사는 자장 법사의 개기후 고려초 도선 국사에 의하여 개창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 본다. 봉곡사사적에는 봉곡사가 가장 왕성하였던 1700년대만 하여도 18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 명부전을 위시하여 동상실(東上室)과 2동의 요사만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