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장군 묘
김종서 장군 묘 Tomb of Kim Jong-s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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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종서 장군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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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omb of Kim Jong-seo |
한자 | 金宗瑞 將軍 墓 |
주소 |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산 45 산45번지 외 7필지 |
지정(등록) 종목 |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2호 |
지정(등록)일 | 2012년 12월 31일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기/11,727㎡ |
웹사이트 | 김종서 장군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조선 초기의 재상인 절재 김종서(1390∼1453)의 묘이다.
절재 김종서는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태어나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한 후 함길도 도절제사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세종 때에 6진을 개척하였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였다.
김종서는 좌의정으로 단종을 보좌하다가 세조에게 아들 둘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역적으로 몰려 시신을 전부 거두지 못하고 한쪽 다리만을 이곳 묘소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묘비 중에 작은 비가 원래의 것이다. 이 묘비에는 ‘조선 좌의정 절재 김 선생 종서 지묘’라 기록되어 있는데, 충신으로 인정받고 2년 뒤인 영조 24년(1748)에 공주 판관 이익진과 지방 유생들이 세운 것이다.
영문
Tomb of Kim Jong-seo
This is the tomb of Kim Jong-seo (1383-1453),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Born in Wolgok-ri Village of Gongju, Kim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405 and served various government posts. In 1433, he was appointed as governor of Hamgil-do Province (today’s Hamgyeong-do in North Korea) and fought the Jurchen tribes along Korea’s northern border for eight years, eventually claiming the lands around the basin of Dumangang River. In 1451, Kim participated in the compilation of the History of Goryeo (Goryeosa). In 1452, he was promoted to second state councilor under the newly enthroned 12-year-old King Danjong (r. 1452-1455). In 1453, Prince Suyang (i.e. King Sejo, r. 1455-1468) organized a coup to usurp his nephew's throne, during which Kim Jong-seo and his two sons were killed. A legend says that because Kim was declared a traitor, his family could not collect his whole body and only buried one of his legs in this tomb. In 1746, Kim’s honor was posthumously reinstated.
In front of the burial mound, there are three stone monuments. The smallest one on the right is the original tombstone, which was erected in 1748, two years after Kim’s honor was reinstated. The other two were erected later by Kim’s descendants.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김종서(1383-1453)의 묘이다.
김종서는 공주시 월곡리 출신으로, 140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1433년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8년간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두만강 유역의 영토를 개척하였고, 1451년에는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1452년 좌의정이 되어 어린 왕 단종(재위 1452-1455)을 보좌하였으나, 조카의 왕위를 빼앗으려 한 수양대군(후의 세조, 재위 1455-1468)에 의해 이듬해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시신을 전부 거두지 못하고 한쪽 다리만을 이곳 묘소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김종서는 1746년 복권되었다.
봉분 앞에 있는 3개의 비석 중 오른쪽의 가장 작은 비석이 원래의 묘비이다. 이 묘비는 김종서가 복권되고 2년 뒤인 1748년에 세워졌다. 나머지 비석들은 후대에 후손들이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