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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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Stele of Royal Preceptor Hyedeok at Geumsansa Temple, Gimje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인문학연구소.
대표명칭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영문명칭 Stele of Royal Preceptor Hyedeok at Geumsansa Temple, Gimje
한자 金堤 金山寺 慧德王師塔碑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
지정(등록) 종목 보물 제24호
지정(등록)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혜덕왕사 소현(昭顯, 1038-1096)의 생애와 업적 등을 기록한 탑비이다. 소현은 고려 문종 33년(1079)에 금산사 주지가 되어 대규모 중창불사를 단행하였는데, 금산사는 이 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가람을 갖췄다고 한다. 59세에 입적하자 왕은 곧바로 왕사로 추증하였으며, ‘혜덕’이라는 시호와 함께 ‘진응’이라는 탑 이름을 내려주었다. 탑비는 왕사가 열반한 15년 이후 고려 예종 6년(1111)에 세워졌다.

글씨는 구양순 필법의 해서체를 정교하게 새겨놓았다. 받침돌과 거북이를 하나의 통 돌로 조각하였고, 특이하면서도 용맹스러운 기상이 돋보인다. 전라북도에서 매우 찾아보기 어려운 고려시대의 희귀한 탑비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고, 불교사와 서예사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문

Stele of Royal Preceptor Hyedeok at Geumsansa Temple, Gimje

This stele was erected to honor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Sohyeon (1038-1096), an eminent Buddhist monk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Sohyeon was a son of Yi Ja-yeon (1003-1061), a man of political power who served as prime minister of the Goryeo dynasty. Sohyeon became a monk in 1048 and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for monks in 1061. In 1079, he became the head monk of Geumsansa Temple and led the expansion of the temple in terms of both physical scale and cultural influence. It was at this time the temple reached its greatest size. After his death, King Sukjong (r. 1054-1105) bestowed him with the posthumous title of royal preceptor and named him Hyedeok, meaning “wise and virtuous.”

This stele was erected in 1111. It consists of a body stone and tortoise-shaped pedestal with a dragon head. It should have a capstone, but it is missing. The epitaph carved on the front side commemorates Sohyeon's life and achievements, and the inscription on the back records the names of his followers, which amount to nearly 1,800.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고려시대의 승려인 소현(1038-1096)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탑이다.

소현은 당시 세도가이자 문하시중을 지낸 이자연(1003-1061)의 아들이다. 1048년에 출가했고, 1061년 승과에서 합격하였다. 1079년 금산사 주지가 되면서 대규모의 중창 불사를 단행하였으며, 금산사는 이때 가람 역사상 가장 큰 규모를 갖췄다고 한다. 입적 후에는 숙종이 그를 왕사로 추증하며 혜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비는 1111년에 세워졌다. 받침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머릿돌은 없어졌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에는 용의 모습을 한 머리가 있다. 전면에 새겨진 비문은 스님의 행적과 업적을 기리고 있으며, 뒷면에는 문도(門徒)를 열거하였는데, 그 수가 1800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