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한 묘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김복한 묘
Tomb of Kim Bok-han
김복한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김복한 묘
영문명칭 Tomb of Kim Bok-han
한자 金福漢 墓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70-4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지정(등록)일 1984년 5월 17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김복한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김복한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철종 1년(1860) 7월 24일 홍주목 조휘곡(현재의 홍성군 갈산면 운곡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 호는 지산이다. 고종 29년(1892)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리와 승지를 지냈으나, 1894년 4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 홍성으로 돌아왔다.

1895년 8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김복한은 홍주 지역의 선비 이설·안병찬·이근주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서울에 가서 ‘나라를 팔아먹은 인사를 처단하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투옥되었다. 12월 30일에 석방되자, 1906년에 민종식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김복한은 1919년 전국 유림*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보낸 일로 감옥에 갇혔으나, 병으로 90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1년에는 인지재(仁智齋)를 세워 제자 양성에 힘을 쏟다가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묘소를 만들고, 1973년에는 추양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유림: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 무리

영문

Tomb of Kim Bok-han

This is the tomb of Kim Bok-han (1860-1924), a civil official and civilian army leade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an independence activist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Kim Bok-han was born in Ungok-ri Village and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892. He went on to serve in various official posts, but resigned from office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in 1894 when Japanese troops stormed and took over Gyeongbokgung Palace.

Upon the Japanese assassination of the queen in 1895, Kim Bok-han mobilized a civilian army together with scholars in the Hongju area and was arrested. At the news of the signing of the Japan-Korean Protectorate Treaty of 1905, he went to Seoul where he submitted a petition to “punish and take revenge upon the leaders who betrayed the country.” He was sent to prison but was released a month later. The following year, he once again mobilized a civilian army and took Hongjueupseong Walled Town, the seat of the local government, but it was usurped again by Japanese soldiers.

In 1919, right after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took place, Confucian scholars nationwide planned to submit a petition to the Paris Peace Conference for Korea’s independence from imperial Japanese rule. Kim Bok-han also participated in this endeavor, so he was arrested and sent to prison but was released due to illness just 90 days later. After this, he dedicated himself to teaching his disciples in his hometown, where he later passed away.

The tomb consists of a burial mound, a stele, and a stone table. In 1973, Chuyangsa Shrine was built nearby as a venue for performing veneration rituals.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일제강점기의 의병장인 김복한(1860-1924)의 묘이다.

김복한은 운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89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지냈으나 1894년 일제가 경복궁을 점령하며 침입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895년 일제가 왕비를 시해한 뒤 김복한은 홍주 지역의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서울에 가서 ‘나라를 팔아먹은 인사를 처단하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투옥되었다. 한달여 만에 석방되고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했다가 일본군의 기습으로 다시 성을 빼앗겼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난 후 한국의 유림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김복한 역시 이 일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나, 병으로 90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에서 제자 양성에 힘을 쏟다가 세상을 떠났다.

봉분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있으며, 1973년에는 추양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