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대전형무소 망루
구 대전형무소 망루 Watchtower of the Former Daejeon Pri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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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구 대전형무소 망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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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Watchtower of the Former Daejeon Prison |
한자 | 舊 大田刑務所 望樓 |
주소 | 대전광역시 중구 목중로 34 (중촌동) |
지정(등록) 종목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7호 |
지정(등록)일 | 2001년 6월 2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근대정치국방/국방 |
시대 | 일제강점기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구 대전형무소 망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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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대전형무소 망루는 수형자를 감시하기 위해 대전형무소 담장 모서리에 세웠던 감시 초소이다.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많아지자 일제는 부족한 수감 시설을 확충하기 위하여 1919년 대전감옥으로 개소한 곳이다. 이곳은 1923년 대전형무소로, 1961년 대전교도소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후 1984년 대전교도소가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부분의 시설이 철거되고, 1987년 부지 일부에 아파트가 건립되어 현재는 형무소의 흔적 중 우물 1기와 망루 1기만 남아 있다.
대전형무소는 일제강점기에 안창호, 여운형, 김창숙 등 많은 항일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이 반공주의자들과 민간인을 학살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학살 장소 중 한 곳이 현재 남아 있는 우물이다. 1960년대 이후에는 화가 이응노 화백의 수감을 비롯하여 독재에 항거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망루의 높이는 7.85m이며, 건축 면적은 30.5㎡이다. 망루는 붉은 벽돌을 원통형으로 쌓고 시멘트모르타르(시멘트와 모래를 물에 갠 접합제)로 마감했다. 평면은 장방 원형으로 내부에 계단을 두고 최상층에 감시실을 두었다. 최상층에는 발코니를 내밀어 난간을 설치했는데, 평슬래브 지붕을 몸채보다 넓게 밖으로 내밀어 발코니에서 비를 맞지 않도록 했다.
감시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철재로 가파르게 만들었고, 중간에 환기와 채광을 위한 작은 창이 뚫려 있다. 최상층 감시실은 출입문과 사방으로 창을 두어 형무소 내외를 잘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최상층의 감시실을 제외한 망루의 몸채 부분에는 큰 간격으로 격자형 줄눈을 만들어 두었다.
망루 하층부에는 벽돌담과 연결되었던 흔적이, 중간부에는 철거 당시 벽돌담이 뜯긴 흔적이 남아 있다.
영문
Watchtower of the Former Daejeon Prison
This watchtower was a guard post of Daejeon Prison. Daejeon Prison was established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o accommodate the growing number of prisoners from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During the colonial period (1910-1945), many Korean patriots were imprisoned here. It is also where the North Korean army slaughtered anticommunists and civilians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After the 1960s, many democratic leaders who opposed the dictatorship were imprisoned here. In 1984, a new prison was built in Daejeong-dong, Yuseong-gu, so most of the facilities here were demolished. In 1987, an apartment complex was built on part of the site. All that remains of the prison are this watchtower and a well.
It is said that the first watchtower built at this site was made of wood, but was replaced with a concrete watchtower sometime after 1940. The current watchtower, built in 1971, measures 7.85 m in height and is made of red brick finished with cement mortar. Inside the oblong structure is an iron staircase that leads to the observation room at the top, which is surrounded by a balcony and railing. Small windows were installed on the sides of the watchtower for natural lighting and ventilation. Traces of where the watchtower originally connected to the prison wall can be seen on one side of the watchtower’s base.
영문 해설 내용
이 망루는 대전형무소에 세웠던 초소이다. 대전형무소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3.1운동으로 늘어난 수감자를 수용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항일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며,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반공주의자와 민간인을 학살했던 곳이기도 하다. 1960년대 이후에는 독재에 항거한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옥고를 치렀다. 1984년 유성구 대정동에 새 교도소가 옮겨가면서 이곳의 시설은 대부분 철거되었고, 1987년에는 부지 일부에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현재 형무소와 관련한 시설은 망루 1기와 우물 1기만 남아 있다.
처음에는 나무로 된 초소가 있었는데, 1940년 이후 콘크리트 재질의 망루로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망루는 1971년에 세워졌다. 붉은 벽돌을 쌓은 후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했고, 높이는 7.85m이다. 내부에는 꼭대기 층의 감시실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꼭대기에는 발코니를 두고 난간을 설치했다. 중간에 환기와 채광을 위한 작은 창을 뚫었다. 망루의 아래쪽에는 벽돌담과 연결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참고자료
- 대전 감옥터 망루, 일제강점기 아닌 1971년에 설치, 오마이뉴스, 2019.5.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34794&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팀장은 이날 '대전감옥 100년, 역사성과 제언' 주제 발표에서 대전 감옥 옛 터에 남아있는 '타원형 콘크리트 망루'가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국유재산대장(대전교도소,1978)을 보면 1971년 12월 20일 신설로 기록돼 있다"며 "당시 대전교도소 모서리 네 군데에 설치된 망루 중 하나가 확실하다"고 말했다. / 망루 변천사도 흥미롭다. 대전 감옥의 초기 망루는 형무소 담 외부에 나무 초소였다. 1940년 이후 콘크리트 재질의 사각 기둥 망루로 교체됐다.
- 대전형무소, 역사·평화·인권 교육 현장으로 탈바꿈해야, 디트NEWS24, 2019.5.8.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View.html?idxno=547104 -> 대전 감옥은 3·1운동 후인 1919년 5월 1일 일제에 의해 지어졌다. 1923년 5월 5일 조선총독부령 제72호에 의해 대전형무소로 명칭이 바뀌었고, 1933년 사상범 감옥으로 지정돼 도산 안창호, 최익환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가뒀다. 대전형무소는 1961년 대전교도소로 또다시 개칭됐고, 1984년 현 소재지인 유성구 대정동으로 이전했다.
- 남북은 이곳에서 교차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프레시안, 2021.5.24.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52118043138018?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0DKU -> 대전형무소가 사상범들을 가두기 위한 특별한 형무소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1920년대 대전형무소를 지으면서 원래부터 장기수와 사상범을 위한 특별감옥으로 설계했다. 따라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재판을 받고 형이 확정된 많은 독립투사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감옥살이를 했다. / 1960년대 전국 13곳 형무소에 흩어져 있었던 5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을 박정희 정부가 이곳으로 이감시키면서, 대전형무소(대전형무소 특사)는 좌익장기수 감옥, '현대의 유배지'로 악명을 떨치게 됐다. / 1950년 6월 27일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도주한 이승만은 7월 1일 다시 목포를 거쳐 해군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도주했다. 대전이 북한군에 넘어가게 되자 이승만 정부는 6월말부터 7월까지 산내골에서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정부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1차에 1400명, 2차에 1800명, 3차에 1700명 등 49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1차 학살은 충청남도 지역 보도연맹원, 2차 학살은 여순사건 관련자 등 그 이전부터 대전형무소에 갇혀있던 좌익사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보도연맹원들도 일단 대전형무소에 수용했다가 산내골로 끌고 와 학살한 것이다. 정부조사와 달리, 여러 연구들은 약 7000명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후퇴하면서 조국반역죄와 민족반역죄로 대전형무소에 잡아 놓았던 우익 인사들을 산 채로 던져버린 것으로 알려진 현장이다. 북한군은 이 우물 이외에도 형무소 후문 북쪽 밭고랑 등에서 우익 인사들을 집단학살했다. 국군이 들어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우물에서 건진 171구의 시신을 비롯해 희생자 수가 1557명에 달했다고 한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면 북한군이 남기고 간 시신들의 사진을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