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운조루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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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운조루 고택
Unjoru House, Gurye
구례 운조루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구례 운조루 고택
영문명칭 Unjoru House, Gurye
한자 求禮 雲鳥樓 古宅
주소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
지정(등록) 종목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지정(등록)일 1968년 11월 25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0필지/4,411㎡
웹사이트 구례 운조루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구례 운조루 고택은 영조 52년(1776)에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가 지은 것으로, 조선 시대의 양반 가옥의 대표 건물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집터가 금환락지(金環落地)* 형세로 남한 3대 길지의 하나라고 한다.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一’자형이나 ‘ㄱ’자 형 안채가 많은데, 이와 달리 운조루 고택은 ‘ㄷ’자형의 안채와 ‘丁’자형 사랑채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 형식이다. 이 형식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운조루를 세우기 시작한 해는 1771년으로 유이주가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고 살았던 집의 형식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운조루는 7년이라는 긴 공사 기간을 거쳐 1776년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의 초기 모습은 180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전라 구례 오미동 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땅.

운조루

운조루는 구례 운조루 고택의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의 이름이다. 이는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 또는 ‘구름 위를 나는 새도 돌아오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운조루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시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오네)

에서 첫머리인 ‘운(雲)’자와 ‘조(鳥)’자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가빈터

가빈터란 집안 내에 죽은 사람을 모셔 두는 곳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운명 후 3일이 지나면 입관을 하고, 석 달 동안 ‘가빈터’에 시신을 모셨다가 출상하여 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는 전국 각지에 부음을 전하고 문상객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장례 기간을 최대 90일 정도로 설정하고 장례를 통상 100일장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안치 기간 중에는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삭망*에는 제례를 올렸다.


  • 삭망(朔望):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을 아울러 이르는 말.

타인능해

타인능해(他人能解)는 ‘누구나 열 수 있다.’라는 뜻이다. 이는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운조루의 큰 뒤주 아래쪽 마개에 쓰인 글귀로 누구든 뒤주의 마개를 열어 쌀을 가져가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쌀 뒤주를 안채가 아닌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곳에 두었다. 이는 가난한 이웃이 눈치 보지 않고 쌀을 가져 갈 수 있도록 배려한 운조루의 정신을 보여 준다. 운조루가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이웃을 배려하는 타인능해의 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문

Unjoru House, Gurye

This house was built by Yu I-ju (1726-1797), a military official of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In 1771, Yu was dispatched to Nagan (today’s Suncheon area) as a magistrate. Upon arrival, he began building this house which was finished in 1776. The house is representative of upper-class residences of the Joseon period. According to Korean feng shui principles, this location is regarded as one of the three most auspicious places for a house in South Korea.

This house consists of a servant’s quarters, men’s quarters, secondary men's quarters, storehouse, women’s quarters, and a shrine. The servants’ quarters are the long linear building at the front of the complex with the main gate in the center. This servants’ quarters of this house was the largest among Joseon literati houses. This shows the prosperity and status of the household.

The entrance leads to the courtyard where the men’s quarters stands. The larger main men's quarters on the left was used by the master of the house while the smaller secondary men's quarters to the right was used by his son. The rooms in the men's quarters are separated by walls made of liftable doors which allow the spaces to be joined into a single large room when necessary. This building also features an elevated wooden-floored porch. Next to the porch, there is a ramp made of stone, which allowed servants to carry heavy parcels into the house on a wheeled cart.

The inner gate in the men’s quarters area leads to the women’s quarters which was used by the wife, daughters-in-law, and children of the house. The women's quarters and storehouse form a square shape with a courtyard in the center. This is not typical of Jeolla-do region houses which usually have linear or L-shaped women's quarters which do not allow for an enclosed inner courtyard. This suggests the design of this house was influenced by the architectural style of Yu’s hometown in the Gyeongsang-do region.

Unjoru Hall

This building is the men’s quarters. It is named Unjoru, which means “a secluded pavilion like a bird’s nest in the clouds” or “a pavilion to which a bird flying high above cloud returns.” It is said this building was named by borrowing the characters – cloud and bird – from two lines of a poem entitled “The Return” written by Tao Yuanming (365-427), one of the greatest poets of China's Six dynasties period.

The cloud, without intention, emerges from the mountain top. (雲無心以出岫)
The bird, weary from flight, knows to return. (鳥倦飛而知還)

Mortuary Room

This room functioned as a space to temporarily hold the body of a family member after they passed away.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upper class followed strict funerary and mourning rituals in which the body was put in a coffin on the third day after death, and then kept in this room until the third month after death, only after which it was buried. This long period served to notify the relatives and associates in different provinces of the death of the family member and let them come and attend the memorial service. During this period, a sacrifice was offered to the deceased every morning and evening, and a ritual ceremony was performed on the first and fifteenth days of each month.

"Other People May Unlatch" Rice Container

This wooden container filled with rice was placed where it could be easily accessed so that anyone in need of rice could take some. The four Chinese characters written at the bottom of the jar mean "other people (not of the family) may unlatch (the lid)." The philanthropic spirit and caring acts of this family towards its neighbors have long been greatly appreciated.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조선 후기의 무신이었던 유이주(1726-1797)가 지었다. 유이주가 1771년 낙안(지금의 순천)의 군수가 되면서 터를 닦기 시작하였고, 대공사를 거쳐 1776년에 완공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반 가옥이며, 집이 위치한 곳은 남한 3대 명당 중 하나라고 한다.

집은 행랑채, 사랑채, 작은사랑채, 곳간채, 안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 양옆에 늘어선 행랑채는 머슴들이 살던 곳이다. 조선 사대부 집 중 가장 긴 행랑채였다고 하며, 이 집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큰사랑채는 집주인이 거처하면서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고, 그 오른쪽의 작은사랑채는 아들이 머물던 곳이다. 사랑채에는 들문을 설치해서, 필요에 따라 모든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했다. 사랑채에는 누마루가 있고, 누마루 옆에는 돌을 놓아 만든 오르막길이 있는데 이는 하인들이 무거운 물건을 수레로 옮길 때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랑채에 있는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 수 있다. 안채는 안주인과 며느리, 자녀들이 거처하였다. 전라도 지역의 ‘一’자형이나 ‘ㄱ’자형 안채와 달리, 이 집은 안채와 곳간채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는 유이주의 고향인 경상북도 지역 집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운조루

이 건물은 사랑채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 또는 ‘구름 위를 나는 새도 돌아오는 집’이라는 뜻으로 운조루라고 한다. 이 이름은 중국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시에서 첫머리인 ‘운(雲)’자와 ‘조(鳥)’자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오네)

가빈터

이곳은 집안의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을 잠시 모셔 두는 곳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운명 후 3일이 지나면 입관을 하고, 석달 동안 가빈터에 시신을 모셨다가 묘지에 안장하는 엄격한 장례절차를 따랐다. 이는 전국 각지에 부음을 전하고 문상객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장례 기간을 길게 설정한 것이다. 안치 기간 중에는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올리고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는 제례를 올렸다.

타인능해

이 나무통은 쌀을 보관하던 것으로, 쌀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와서 가져갈 수 있도록 접근하기 쉬운 곳에 두었다. 나무통 아래에 적혀있는 네 글자의 한자는 “이 집의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도 마개를 열 수 있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박애정신과 이웃에 대한 배려는 오랫동안 칭송을 받아왔다.

갤러리

참고

동영상

주석

  1. 운조루”, 전통건축과 장소, 문화원형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