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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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Tombs of Seven Patriotic Martyrs in Seokjugwanseong Fortress, Gurye
석주관 칠의사 묘”, 구례여행.
대표명칭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영문명칭 Tombs of Seven Patriotic Martyrs in Seokjugwanseong Fortress, Gurye
한자 求禮 石柱關 七義士墓
주소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지정(등록) 종목 사적 제106호
지정(등록)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순절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0,152㎡
웹사이트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칠의사묘

석주관 칠의사 묘는 조선 선조 30년(1597)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에 석주관성에서 싸우다 순절한 의병장 일곱 분과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당시 구례 현감을 모신 무덤이다. 왼쪽부터 현감 이원춘과 칠의사 왕득인,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왕의성을 모신 묘이다.

선비 왕득인은 구례와 남원성이 왜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석주관성으로 가서 진주, 하동 방면에서 몰려오는 왜적과 맞서 싸웠다. 구례의 젊은 선비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왕의성 등은 구례로 들어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는 왜적들에 맞서서 각각 의병을 수백 명씩 모집하고 화엄사에서 승병 153명과 군량미 103석을 지원 받아 왜적과 혈전을 벌였으나 석주관성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전란 후에 칠의사 후손들은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혼을 불러 묘를 조성하였고, 순조 4년(1804)에 나라에서 왕득인을 포함한 칠의사의 충절을 기려 관직을 내렸다.

칠의사단

칠의사 단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때에 석주관문(石柱關門)을 지키다 숨진 구례 출신 칠의사와 당시 현감과 의병과 승병의 충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만든 단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 석주관에서 의병장 일곱 명과 의병 3,500명, 화엄사 승병 153명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순조 5년(1804)에 나라에서 칠의사의 충절을 기려 관직을 내렸다. 고종 5년(1868)에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충효사(남전사)에 모셨던 위패를 이곳에 매장하고 칠의사 단이라고 불렀다. 1942년에 일제가 묘역을 훼손하자 후손들이 각기 선산으로 이장하였다가 1945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단을 복원하였다.

이곳 단에는 왼쪽부터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현감 이원춘과 일곱 분의 의사인 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의 위패석과 석상이 있다. 단의 높이는 77㎝이다.

영문

Tombs of Seven Patriotic Martyrs in Seokjugwanseong Fortress, Gurye

Tombs of Seven Patriotic Martyrs

These are the tombs of seven civilian army commanders and the magistrate of Gurye who heroically died fighting the Japanese army at Seokjugwanseong Fortres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7. From left to right are the tombs of Yi Won-chun, Wang Deuk-in, Yi Jeong-ik, Han Ho-seong, Yang Eung-rok, Go Jeong-cheol, O Jong, and Wang Ui-seong.

When a scholar from Gurye, Wang Deuk-in, heard the news that a nearby fortress had fallen to the Japanese, he organized a civilian army in the Gurye area and, with help of his son Wang Ui-seong and other scholars, managed to mobilize over 3,500 people. Together with 153 Buddhist monks, they collected food supplies at Hwaeomsa Temple and deployed the troops at Seokjugwanseong Fortress where they fought the invaders. All the commanders except Wang Ui-seong died in this battle. Wang Ui-seong mobilized a civilian army once more during the Manchu invasion of 1637.

After the war, tombs and an altar dedicated to the seven civilian army commanders were built next to the fortress. In 1804, the royal court posthumously bestowed each of them with honorary official titles.

Altar for Seven Patriotic Martyrs

This altar was built to honor the fidelity of those who fought the Japanese troops at Seokjugwanseong Fortress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7, namely the seven civilian army commanders (Wang Deuk-in, Wang Ui-seong, Yi Jeong-ik, Han Ho-seong, Yang Eung-rok, Go Jeong-cheol, and O Jong), the magistrate of Gurye (Yi Won-chun), soldiers of the civilian army, and Buddhist monks.

Their army consisted of seven commanders, over 3,500 soldiers, and 153 monks from Hwaeomsa Temple, most of whom died in the battle. In 1804, the royal court posthumously bestowed each of the seven civilian army commanders with honorary official titles.

The spirit tablet of the seven commanders and the magistrate were originally placed in Namjeonsa Shrine built in the 18th century, but after the shrine was shut down by a nationwide decree in 1868, the spirit tablet were relocated her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when the Japanese authorities damaged the tombs, the descendants of the dead relocated them to their family cemeteries, and in 1945 right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the tombs were returned to the original location and the altar was restored.

From left to right are the spirit tablets of Yi Won-chun, Wang Deuk-in, Wang Ui-seong, Yi Jeong-ik, Han Ho-seong, Yang Eung-rok, Go Jeong-cheol, and O Jong. The height of the altar is 77 cm.

영문 해설 내용

칠의사묘

이곳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석주관성에서 싸우다 순절한 의사 7인과 당시 구례 현감의 묘이다. 왼쪽부터 이원춘, 왕득인,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왕의성의 묘이다.

구례 지역의 선비였던 왕득인은 인근의 성이 왜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석주관성으로 가서 왜적과 맞서 싸웠다.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을 비롯하여 다른 선비들도 3,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화엄사에서 승병 153명과 군량미를 지원받아, 석주관성에서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왕의성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왕의성은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7인의 의병장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묘를 조성하였다. 1804년에는 조정에서 이들의 충절을 기려 관직을 내렸다.

칠의사단

칠의사 단은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석주관성을 지키다 숨진 구례 출신의 의사 7인(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당시 구례 현감(이원춘), 의병과 승병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임진왜란 당시 석주관성에서는 의병장 7명과 의병 3,500여 명, 화엄사 승병 153명이 왜적과 싸웠으며,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1804년 조정에서는 의병장 7명의 충절을 기려 관직을 내렸다.

칠의사와 현감의 위패는 원래 18세기에 건립된 남전사라는 사당에 모셨었는데,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고 위패는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는 일제가 묘역을 훼손하자 후손들이 각기 선산으로 이장하였다가, 해방 직후인 1945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단을 복원하였다.

왼쪽부터 현감 이원춘과 의병장 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의 위패석과 석상이 있다. 단의 높이는 77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