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노비
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노비 Stele of Monk Eungjun at Songcheonsa Temple Site, Gwangy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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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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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of Monk Eungjun at Songcheonsa Temple Site, Gwangyang |
한자 | 光陽 松川寺址 悔隱長老碑 |
주소 |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산196-1번지 |
지정(등록) 종목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2호 |
지정(등록)일 | 1992년 3월 9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관리자 | 광양시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노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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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송천사지 회은장로비는 병자호란 때 승병으로 활약했던 승려 응준(應俊, 1587~1672)을 기리기 위해 숙종 3년(1677)에 세운 것이다. 회은(悔隱)은 응준의 호이고, 장로는 불교에서 지혜와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고승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응준은 속성이 기씨(奇氏)로 15세에 출가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벽암(碧巖)을 따라 승병군에 합류하였고, 남한산성에서 공을 세워 현종 원년(1660)에는 승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응준이 세상을 뜬 5년 뒤에 당시 전라도순찰사 박신규(朴信圭)와 광양현감 안시익(安時翊)이 송천사의 승려들과 함께 비를 세웠다.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이 승려의 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섰는데, 이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이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의 앞면은 두 마리의 용을 새겨 장식했고, 뒷면에는 개구리, 자라, 게 등 다양한 동물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비문은 시문에 능했던 승려 백곡처능(白谷處能)이 지었고, 글씨는 종친이자 서화가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썼다. 비문에는 회은의 출생, 출가 후의 행적, 승장으로서의 활동, 비를 세우게 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영문
Stele of Monk Eungjun at Songcheonsa Temple Site, Gwangyang
This stele was erected in 1677 at Songcheonsa Temple to honor the Buddhist monk Eungjun (1587-1672), a soldier-monk who fought during the Manchu invasions of 1637.
Eungjun became a monk at the age of 15. When the Manchu invasion occurred in 1637, he joined the army of monk soldiers along with his teacher, the monk Byeokam (1575-1660). He helped defend Namhansanseong Fortress, for which he became a leader of soldier-monks in 1660. This stele was erected five years after his death by Bak Sin-gyu (1631-1687), the chief border inspector of Jeolla-do Province, and An Si-ik (1630-?), the magistrate of Gwangyang, together with the monks of Songcheonsa Temple.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it was rare for local officials to take the lead in erecting a stele for a Buddhist monk.
The stele consists of a rectangular pedestal, a body stone with an inscription, and a capstone. The capstone features detailed carvings of two dragons on the front and animals such as a frog, a terrapin, and a crab on the back. The inscription was composed by Cheoneung (1619-1680), a Buddhist monk and great poet, and was calligraphed by Yi U (1637-1693), a calligrapher and the grandson of King Seonjo (r. 1567-1608). The inscription records the details of Eungjun’s birth, his accomplishments after he became a monk, his activities as the leader of soldier-monks, and the reasons why the stele was erected. On the back of the stele, there is a list of the people who took part in erecting the stele.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병자호란 때 승병으로 활약했던 승려 응준(1587-1672)을 기리기 위해 1677년에 세웠다.
응준은 15세에 출가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벽암(1575-1660)을 따라 승병군에 합류하였고, 남한산성에서 공을 세워 1660년에는 승병장이 되었다. 응준이 입적하고 5년 뒤에 당시 전라도순찰사 박신규(1631-1687)와 광양현감 안시익(1630-?)이 송천사의 승려들과 함께 비를 세웠다.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이 승려의 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선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이 비는 사각형의 받침돌, 비문을 새긴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돌의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겼고, 뒷면에는 개구리, 자라, 게 등 다양한 동물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비문은 시문에 능했던 승려 처능(1619-1680)이 지었고, 글씨는 선조(재위 1567-1608)의 손자이자 서화가인 이우(1637-1693)가 썼다. 비문에는 응준의 출생, 출가 후의 행적, 승장으로서의 활동, 비를 세우게 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
응준 | Actor | 응준(應俊,_1587-1672) | |
회은장로 | Concept | 회은장로(悔隱長老) | 응준의 호. 비석의 이름. |
광양_송천사지 | Place | 광양_송천사지 | |
송천사 | Place | 송천사 | |
도선국사 | Actor | 도선국사(道詵國師,_827-898) | 송천사 창건 |
벽암각성 | Actor | 벽암(碧巖覺性,_1575-1660) | |
병자호란 | Event | 병자호란(1636) | |
박신규 | Actor | 박신규(朴信圭_ 1631-1687) | |
안시익 | Actor | 안시익(安時翊,_1630-?) | |
이우 | Actor | 이우(李俁,_1637-1693) | |
백곡처능 | Actor | 백곡처능(白谷處能,_ 1619-1680) | |
광양_송천사지_회은장노비 | Object | 광양_송천사지_회은장노비 | |
팔방도총섭 | Concept |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
광양_송천사지_회은장노비 | 응준 | isSteleOf |
응준 | 회은장로 | sameAs |
광양_송천사지_회은장노비 | 광양_송천사지 | currentLoc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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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사 | 도선국사 | founder |
벽암각성 | 응준 | hasDisciple |
벽암각성 | 병자호란 | isRelatedTo |
응준 | 병자호란 | isRelatedTo |
팔방도총섭 | 응준 | hasAppointee |
팔방도총섭 | 병자호란 | isCausedBy |
광양_송천사지_회은장노비 | 박신규 | contributor |
광양_송천사지_회은장노비 | 안시익 | contributor |
광양_송천사지_회은장노비 | 이우 | writer |
광양_송천사지_회은장노비 | 백곡처능 | calligrapher |
참고자료
- 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노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601820000 → 송천사터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조선 중기 승려인 회은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회은의 성은 기씨이며, 자는 응준으로, 회은은 그의 호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벽암대사가 모은 승병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사 절충과 양호도총섭에 임명하였고, 인조 25년(1647)에는 가선대부와 팔도도총섭에 이르렀다. 현종 원년(1660)에는 품계를 올리어 자헌에 이르고 승병대장이 되었으며, 현종 4년(1663)에 특별히 품계를 올리어서 정헌으로서 군무를 맡아 보았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머릿돌의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용을 비롯한 게, 개구리, 자라 등의 여러 동물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문은 대체로 판독이 가능하나, 비몸 곳곳이 상당히 훼손되어 안타까운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순찰사 박신규와 광양 현감 안시익이 이 절의 승려들과 함께 세웠다고 하며, 연대는 숙종 3년(1677)이라 적고 있다. 비의 이름을 승려의 법명이 아닌 회은이라는 호를 쓰고 있는데, 이는 승려로서라기 보다는 승병대장으로 그 활약이 더욱 더 두드러졌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장로’라 칭하여 그의 덕을 높이 평가하고, 순찰사나 현감이 앞장서서 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승려가 낮게 평가되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 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로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5180 → 비의 높이 274cm.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 오는 송천사는 폐사되어 유구(遺構)가 거의 없으나 다행히 나한전지라 전해지는 건물지 앞의 개울가에 회은장로비만 홀로 서 있고 맷돌이나 그 밖의 석조물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비신은 세장한 장방형으로 곳곳에 총탄의 흔적과 손상이 있다. 이수는 장방형으로 윗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그 아래에 용신의 비늘과 구름무늬가 가득 있고 따로 제액을 마련하지 않았다. 뒷면에는 용의 꼬리부분과 함께 게·거북이·달팽이 등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 구름무늬가 가득하다.비좌(碑座)는 없었는데 최근에 장방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문은 조선 후기 시문에 능했던 백곡처능(白谷處能)이 지었고 글씨는 낭성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썼으며 1677(숙종 3)에 건립되었다. 비신의 윗면에는 “회은장로비명(悔隱長老碑銘)”이란 제명(題名)이 전서(篆書)로 되어 있고 비문은 해서체이다.비문에는 회은의 출생, 출가 후의 행장과 승장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그의 법손들이 그를 기념하는 비를 세우게 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음기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회은(1587∼1672)은 남원 사람으로 자는 응준(應俊), 호는 회은이라 하며 속성은 기씨(奇氏)이다.15세에 출가하여 옥섬(玉暹)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뒤에 소용·호연·벽암 등 중장의 제자가 되었다. 1633년에 입암성장(笠岩城將)이 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승 벽암을 따라 전공을 세워 다음 해 양호도총섭(兩湖都摠攝)에 임명되었다.1647년에는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머무르며 많은 공을 세웠다. 1651년에 남옹성(南甕城)을 쌓은 공으로 가의(嘉義)로 승급되었으며 1660년에 자헌(慈憲), 1663년에 정헌(正憲)으로 승진되었고 1672년에 86세로 입적하였다.
- “송천사지:옥봉당탑, 송천사지부도군, 송천사지회은장노비 – 전남 광양 [5]”, 문화재?!문화재!, 네이버 블로그, 2015.1.28 https://blog.naver.com/mallarmel/220255642089 → 응준스님의 부도와 탑비는 세종시 금남면 영대리에 있는 밤절사지에 남아있다. / 비의 크기는 전체높이 292cm(다른 자료에는 274cm), 비신높이 185cm, 비폭 76.2cm이다.
- 동곡계곡 옆 비석이 세워진 이유 #광양송천사지회은장노비, 햇살 가득 따스한 광양 공식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2019.9.14. https://blog.naver.com/gwangyangsi/221644900692 → 274cm에 달하는 비석의 몸체에는 곳곳에 총탄의 흔적과 손상이 있습니다. 6.25때인지 여순사건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백운산이 좌우의 이념 대립과 전쟁의 치열한 격전지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며 가슴이 쓰라렸습니다.
- “병자호란과 회은장로비, 그리고 소중화 사상”, 광양시민신문, 2013.06.15. http://www.gycitizen.com/news/articleView.html?idxno=4112 → 비명의 두 번째 부분, 즉 ‘정헌대부 팔도도총섭 겸 승대장 회은장로’는 이 비의 주인공인 회은장로의 관직을 밝히고 있다. 회은장로는 병자호란 때 벽암대사 각성이 승병을 일으키자 그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인조 25년(1647)에 조선 최고의 승직인 팔도도총섭을 제수하였고, 현종 원년(1660)에 승대장으로, 마침내 현종 4년(1663)에 정2품의 정헌대부로 임명하였다. 이 비의 음기를 보면, 1672년 회은장로가 열반에 든 후 5년째 되던 1677년 순찰사 박신규와 당시의 광양 현감 안시익, 그리고 송천사가 합동으로 비를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려를 천하게 여기던 조선시대에 순찰사나 현감이 승려의 비 건립에 앞장섰다는 점도 회은장로의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높이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지혜와 덕이 높고 법랍이 많은 스님을 높이어 일컫는 장로라는 말 앞에 법명인 응준이 아닌 회은이란 호를 쓰고 있는 점은 사대부 관리들의 한계로 보인다. / 옥룡면 동곡리 선동마을 아래 백운산 계곡에 자리한 송천사는 옥룡사, 운암사와 더불어 백운산의 3대 사찰로 손꼽히던 대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폐사된 이후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조차 어려워졌다. 절터는 이미 오래전에 논밭으로 개간되었고, 현재는 식당까지 들어서 있다. 다행히 절터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승탑 3기와 회은장로비가 이곳이 옛 절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 응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100 → 인물 내력
- <참고> 숙종실록 5권, 숙종 2년 1월 27일 경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sa_10201027_001 → 1676년 청 강희(康熙) 15년김하천·이화진·권유·이하진·박신규·김옥현·목창명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하천(金厦梴)을 장령(掌令)으로, 이화진(李華鎭)을 정언(正言)으로, 권유(權愈)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하진(李夏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박신규(朴信圭)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김옥현(金玉鉉)을 승지(承旨)로, 목창명(睦昌明)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 <참고> 승정원일기 248책 (탈초본 13책) 숙종 1년 7월 27일 계축 17/34 기사 http://sjw.history.go.kr/id/SJW-D01070270-01700 → 1675년 康熙(淸/聖祖) 14년金玉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吏批, 以金玉鉉爲承旨, 李彦茂爲瓦署別提, 安時翊爲光陽縣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