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전봉준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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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전봉준 생가터
Birthplace of Jeon Bong-jun, Gochang
대표명칭 고창 전봉준 생가터
영문명칭 Birthplace of Jeon Bong-jun, Gochang
한자 高敞 全琫準 生家터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59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146호
지정(등록)일 2021년 4월 9일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지
시대 조선후기
수량/면적 1필지 2,813㎡
웹사이트 고창 전봉준 생가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전봉준 생가터는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이 태어난 곳이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1855년 12월 3일(양력1856.1.10.)에 서당 훈장을 하던 아버지 전창혁과 어머니 언양 김씨의 아들로 태어나서 13세 무렵까지 살았다. 이곳은 천안 전씨 족보인 『병술보』, 오지영의 『동학사』 등의 학술 고증과 마을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전봉준 생가터로 인정받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봉준 집안은 19세기 초에 이곳 당촌마을로 이주해 와서 살았다. 전봉준 생가는 큰방, 작은방, 부엌으로 이루어진 세 칸짜리 흙담집이었다고 전해지나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관군이 동학 관련자들의 집을 불태우면서 터만 남았다.

전봉준은 1894년 3월 20일(양력1894.4.25.)에 동학 대접주* 손화중, 김덕명, 김개남 등과 함께 무장현 당산(현재 공음면 구수) 들판에서 동학농민군을 조직해 봉기하였다. 이 1차 봉기에서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나라의 불의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을 목표로 내세운 무장포고문을 발표했다. 전봉준은 일본군이 한양 궁궐을 침입하자 외세의 간섭에 반대하는 2차 봉기도 주도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30일(양력1895.4.24.)에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는 작은 체구에도 당차고 다부진 모습을 지녀 녹두장군이라고 불렸다.


  • 대접주: 동학의 읍면단위 교단 조직인 접의 총괄 책임자.

영문

Birthplace of Jeon Bong-jun, Gochang

This is the birthplace of Jeon Bong-jun (1856-1895), a prominent religious figure and leader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 house where Jeon was born was burnt down in 1894 by the Korean army as retribution for participation in the revolution.

Jeon Bong-jun’s family had resided in Dangchon Village in Gochang since the early 19th century, but when he was about 13 years old, Jeon’s family moved to Gobu (today’s Gobu-myeon, Jeongeup). In around 1890, Jeon joined the indigenous religious movement Donghak (“Eastern Learning”) and soon became a Donghak assembly leader. In 1894, Jeon and other Donghak leaders made a proclamation demanding an end to the ruling class’s exploitation and oppression of the people and vowing to improve the people’s livelihood by changing the country’s state of affairs.

Gathering forces, they formed the Donghak Peasant Army and took Jeonjuseong Fortress, the regional capital. This capture prompted the Korean government to request military reinforcements from Qing China. In response, Japan also sent troops to the peninsula, as it was secretly harboring plans to make Korea its colony. To prevent further foreign intervention, the Donghak Peasant Army agreed to a peace treaty with the royal court, but the Japanese troops refused to leave Korea, sparking the First Sino-Japanese War (1894-1895).

As the war between China and Japan raged on, Jeon Bong-jun led a second Donghak Peasant Rebellion, this time against the Japanese troops, which had occupied Joseon’s royal palace. Eventually defeated in the Battle of Ugeumchi, Jeon was captured and sent to Seoul, where he was executed.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 말 종교지도자이자 농민운동가인 전봉준(1856-1895)이 태어난 집이 있던 자리이다. 전봉준의 생가는 1894년 관군이 동학 관련자들의 집을 불태우면서 터만 남았다.

전봉준의 문중은 19세기 초부터 당촌마을에 세거하였고, 전봉준은 13세 무렵 고부(지금의 정읍시 고부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1890년 무렵 동학에 입교하였고 그 뒤 얼마 안 되어 고부 지역의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4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는 「무장포고문」을 발표하여, 지배세력에 의한 수탈과 억압에 반대하고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동학 지도부는 세력을 규합하여 동학농민군을 조직하고 전주성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군대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를 노리던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학 지도부는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와 강화를 맺었으나, 일본은 군대 철수를 거부하였고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전봉준은 일본 침략에 저항하여 2차 동학농민군 봉기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고 1895년 4월 교수형을 당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