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옥천사 일원
고성 옥천사 일원 Okcheonsa Temple and Surroundings, Goseong |
|
대표명칭 | 고성 옥천사 일원 |
---|---|
영문명칭 | Okcheonsa Temple and Surroundings, Goseong |
한자 | 固城 玉泉寺 一圓 |
주소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
지정(등록) 종목 | 시도기념물 제140호 |
지정(등록)일 | 1994년 7월 4일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
수량/면적 | 47,900㎡ |
웹사이트 | 고성 옥천사 일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1
고성 옥천사는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지은 절로, 당나라의 지엄법사에게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화엄경을 강론하기 위해 지었다. 대웅사 왼쪽에서 솟아나는 달고 맛있는 샘물인 감로수(甘露水)를 ‘옥천’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옥천사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당시에는 화엄 사상을 공부하는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비롯해 전국의 대표적인 10대 사찰 중 하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진경국사(國師)* 심희와 고려시대에 팔만대장경 판각에 힘을 쏟은 보융화상 등이 옥천사를 고쳐 지은 후 이곳에서 수행을 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승려들로 조직된 군인인 승병들이 머물러 호국사찰의 기능도 하였다.
고성 옥천사에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120칸 규모의 지소(紙所)**가 있었는데, 이 지소에서 가장 우수한 궁중의 어람용*** 종이를 생산하였다. 지금도 절 옆을 흐르는 계곡을 따라 돌 축대들과, 절구 등이 남아 있고 산 속 암자인 청련암(靑蓮庵)에는 종이의 재료인 닥나무를 삶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큰 무쇠 솥이 남아 있다.
교단을 정화하고, 쇠퇴한 불법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헌신한 청담대종사(大宗師)****가 1926년에 출가하여 이곳 옥천사에서 수행에 매진하였다. 지금도 청담대종사의 제자들이 교법*****의 계통을 전하고 있다.
이 절에는 보물 제495호인 임자명반자(任子銘飯子)와 제1693호인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및 시왕도(十王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인 대웅전(大雄殿), 자방루(咨芳樓), 향로(香爐), 범종(梵鐘) 등의 여러 문화재가 있고, 청련암(靑蓮庵), 백련암(白蓮庵), 연대암(蓮臺庵) 등의 부속 암자가 있다.
- 국사(國師): 국사통일 신라ㆍ고려ㆍ조선 전기의 법계 가운데 하나. 법계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으로 지덕이 높아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승려에게 조정에서 내리던 칭호이다.
- 지소(紙所): 종이를 만드는 재래식 공장.
- 어람용: 임금이 보는 데 쓰임. 또는 임금이 보는 데 쓰는 물건.
- 대종사(大宗師): 대종교에서 가장 높은 종교적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품계.
- 교법(敎法): 부처가 설법한 가르침.
2
고성 옥천사 일원은 오래된 소나무 숲이 울창하며 주위에는 옥천사를 중심으로 청련암(靑蓮庵), 백련암(白蓮庵), 연대암(蓮臺庵) 등의 부속 암자, 청담대종사(大宗師)*의 사리탑 그리고 고승들의 사리탑이 모여 있는 부도밭 등이 있다.
고성 옥천사는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지은 절로, 당나라의 지엄법사에게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화엄경을 강론하기 위해 지었다. 의상대사는 국내의 신령스러운 땅을 찾아 그곳에 사찰을 세워 그 사찰을 의상화엄전교십찰(義湘華嚴傳敎十刹)이라고 하였는데 이곳 고성 옥천사도 의상화엄전교십찰에 포함된다. 옥천사라는 이름은 대웅전 왼쪽에서 솟아나는 달고 맛있는 샘물인 감로수(甘露水)를 ‘옥천’이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하였다. 고성 옥천사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6차례 고쳐 지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17년(1639)에 다시 지은 후, 고종 25년(1888), 1950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삼국유사』와 『법장화상전』에는 모두 ‘비슬산 옥천사’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연화산 옥천사이다.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에 ‘이웃 고을에 같은 이름인 옥천사가 있으므로 쌍계사로 바꾸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고성 옥천사가 쌍계사보다 격이 높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화산은 옛날에 비슬산이라고도 하였다. 연화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인조 때 승려 학명이 ‘높이 선 산세에 연꽃이 핀 듯하다’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연화산에는 선유봉(仙遊峯), 옥녀봉(玉女峯), 탄금봉(彈琴峯) 등과 같이 이름이 붙어 있는 봉우리가 10여 개가 있다. 또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연화산 주변 ‘응봉초경(鷹峯初景), 수등낙조(水燈落照), 장군거석(將軍巨石), 칠성기암(七星奇巖), 연대취연(蓮擡翠煙), 운암낙하(雲庵落霞), 중춘앵화(仲春櫻花), 모추풍엽(暮秋楓葉)’ 8군데를 연화팔경(八景)이라 한다.
- 대종사(大宗師): 대종교에서 가장 높은 종교적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품계.
영문
Okcheonsa Temple and Surroundings, Goseong
1
Okcheonsa Temple is said to have been established in 676 by Monk Uisang (625-702)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He studied the Avatamsaka Sutra in China in 661 and returned to Silla in 671. He then built ten temples in auspicious locations across the country to promote the study of the Avatamsaka Sutra. Okcheonsa is one of those temples.
During the Goryeo period (918-1392), the temple was expanded as many esteemed monks stayed in this templ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the temple complex was completely destroyed. In 1639, it was reconstructed and has undergone several repairs since then.
This temple operated a large-scale paper production workshop from the end of 18th century to the end of 19th century. The paper produced in this temple was used by the royal court. Some of paper production equipment remains. One example is a stone mortar which was presumably used to pound the steamed bark. The other is a large iron pot for steaming the mulberry wood at the Cheongnyeonam Hermitage, which is 50 m away across the nearby valley.
This temple contains two national-level cultural heritages, which are a bronze gong (Treasure No. 495) and a Buddhist painting of Ksitigarbha Bodhisattva and the Ten Underworld Kings (Treasure No. 1693). In addition, about 20 provincial-level cultural heritages are kept in the temple complex.
The temple got its name “Okcheonsa” meaning “a temple with a spring as precious as jade,” because of the natural spring next to Daeungjeon Hall.
2
Okcheonsa Temple is said to have been established in 676 by Monk Uisang (625-702)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He studied the Avatamsaka Sutra in China in 661 and returned to Silla in 671. He then built ten temples in auspicious locations across the country to promote the study of the Avatamsaka Sutra. Okcheonsa is one of those temples.
The temple and its surroundings, densely forested with pine trees, include three hermitages, namely, Cheongnyeonam, Baengnyeonam, and Yeondaeam, and an area dedicated to stupas which enshrine the remains of esteemed monks.
Yeonhwasan Mountain, where Okcheonsa is located, was originally called Biseulsan, meaning “a mountain where an immortal and a heavenly maiden play string instruments." It was renamed Yeonhwasan, meaning “lotus flower mountain,” when Monk Hangmyeong described the shape of the mountain as a lotus flower in the mid-17th century. But the original set of names referring to the peaks of the mountain are still in use such as Seonyubong (“Peak of the Immortal”), Ongnyeobong (“Peak of the Heavenly Maiden”), and Tangeumbong (“Peak of Playing String Instruments”).
There are eight scenic views in Yeonhwasan Mountain: 1) Falcon Peak, 2) sunset in the high peaks, 3) boulders at Warrior’s Peak, 4) strange stones behind Chilseonggak Shrine, 5) the foggy forest near Yeondaeam Hermitage, 6) the misty valley between Baengnyeonam and Yeondaeam Hermitages, 7) the cherry blossoms in spring, and 8) the fall foliage.
영문 해설 내용
1
옥천사는 통일신라시대인 676년에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의상대사는 661년 중국으로 유학해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671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신라 전역에 화엄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의 신령스러운 땅을 찾아 10곳의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옥천사도 그중 하나였다.
고려시대에는 여러 고승들이 이 절에 주석하면서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승려들이 군대를 조직해서 왜군에 대항하였으나, 전란으로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 1639년 사찰을 재건했고,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옥천사에는 종이를 만드는 대규모의 공장이 있었고, 이곳에서는 궁중의 어람용 종이를 생산하였다. 지금도 종이를 만들 때 쓰던 절구 등이 남아있고, 산내 암자인 청련암에는 종이의 재료인 닥나무를 삶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큰 무쇠 솥이 있다.
경내 문화재로는 청동북(보물 제495호),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보물 제1693호) 외에도 20여 개의 시도지정문화재가 있다.
‘옥천사’라는 이름은 ‘옥처럼 귀한 샘물이 솟는 절’이라는 뜻으로, 대웅전 왼쪽에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2
옥천사는 통일신라시대인 676년에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의상대사는 661년 중국으로 유학해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671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신라 전역에 화엄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의 신령스러운 땅을 찾아 10곳의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옥천사도 그중 하나였다.
옥천사 일원은 오래된 소나무 숲이 울창하며, 청련암, 백련암, 연대암 등의 부속 암자와 여러 고승들의 사리탑이 모여 있는 부도밭이 있다.
옥천사가 위치한 연화산의 원래 이름은 비슬산으로, ‘신선이 거문고를 뜯고 옥녀(선녀)가 비파를 연주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런 뜻이 선유봉, 옥녀봉, 탄금봉 등 여러 봉우리 이름에 남아 있다. 연화산이라고 이름이 바뀐 것은 17세기 중반에 승려 학명이 ‘산의 모습이 연꽃이 핀 듯하다’라고 한 것에서 비롯하였다.
연화산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8경이 있다.
1) 옥천사 뒤편의 매봉, 2) 수등의 해질 무렵 경치, 3) 장군봉의 거석, 4) 칠성각 뒤의 기암, 5) 연대암 인근 골짜기의 숲과 안개, 6) 백련암과 연대암 사이 골짜기의 안개, 7) 봄날의 벚꽃 경치, 8) 늦가을의 단풍 경치
참고
- 연화팔경 관련 - “주변관광지”, 옥천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