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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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Stone Jetty of Gapgonnaru Dock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영문명칭 Stone Jetty of Gapgonnaru Dock
한자 甲串나루 船着場 石築路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김포군 월곶리 성동리 일원
지정(등록) 종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5호
지정(등록)일 1995년 3월 2일
분류 유적건조물/교통통신/교통/수상교통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2개소/1,253㎡
웹사이트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2018(인천)

이곳은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와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사이를 배편으로 연결하던 나루터이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이용되었다가 조선 세종 원년(1419) 박신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14년간 공사를 하여 석축로를 완성하였고, 이후 약 500년간 사용되었다. 이후 교통수단의 변화로 1920년경 나루터가 폐쇄되었으며, 1970년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완전히 폐쇄되었다. 정묘호란 때(1627) 인조가 이곳을 건너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병인양요(1866)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2021(김포)

갑곶나루는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와 강화의 갑곶리 사이를 오가던 나루이다. ‘갑곶(甲串)’이라는 이름은 고려 고종이 몽골군의 침략을 당하여 강화도로 피난 갈 때, 이곳이 해안과 거리가 좁고 수심도 얕아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나루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조선 초기 이곳에 귀양와 있던 박신(朴信, 1362~1444)선생이 자신의 사재를 써서 석축로를 축조하였다. 정묘호란 때에 인조가 강화로 도피할 당시 이용했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봉림대군이 수어했다고 전해진다.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후 500년 동안 이용되던 갑곶나루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에 성동리와 강화 용정리에 새로운 나루터가 생기면서 폐쇄되었고, 1970년에 강화대교가 개통하면서 역사속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석축로는 잘다듬은 육면체의 석재와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석축로의 규모는 폭 12m, 길이 40m, 앞면의 깊이 1.2m 규모로, 지형을 활용하여 낮은 수심을 따라 축조한 완경사 선착장 석축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는 염하를 건너 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길목이며, 예로부터 바다와 육지 사이를 왕래하는 고나문으로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영문

  • Stone Jetty of Gapgonnaru Dock

2018(인천)

Gapgonnaru Dock was for the boats running between Gimpo and Ganghwado Island. There had not been any facilities for this dock until Park Sin (1362-1444), a civil official of the early Joseon period, built the jetty in 1419. He continued the construction of the stone jetty for 14 years at his own expense, and the jetty was used for nearly 500 years. In 1627, King Injo (r. 1623-1649) used this jetty to take refuge in Ganghwado Island during the Manchu invasion. Joseon also fought a fierce battle against the French army near here in 1866. After 1920, the jetty was no longer used due to the opening of a new dock.

2021(김포)

The stone jetty of Gapgonnaru Dock was a dock for the ferries that traversed the waters between Gimpo and Ganghwado Island. The name Gapgonnaru means “Ferry Crossing of the Armored Peninsula.” This name is said to have originated from when, as King Gojong (r. 1213-1259) of the Goryeo dynasty (918-1392) passed through this area on his way to refuge on Ganghwado Island during the Mongol invasions, the soldiers removed their armored clothing and stacked the clothes upon the ground so the king could walk along the coast without getting wet.

Originally, this ferry dock lacked any special facilities, but the civil official Bak Sin (1362-1444) used his own resources to built this jetty. It is said that this dock was used by King Injo (r. 1623-1649)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when he fled to refuge on Ganghwado Island during the Manchu invasion of 1627. During the Manchu invasion of 1637, it was here that Prince Bongrim (later King Hyojong, r. 1649-1659) blocked the enemy’s advances. In 1866, the ferry dock was also the site of a fierce battle during the French campaign against Korea. In the 1920s, new docks were built in Seongdong-ri in Gimpo and Yongjeong-ri in Ganghwa which led to the closing of Gapgonnaru Dock. In 1970, Ganghwadaegyo Bridge was opened, which meant that the Ganghwado Island could now be accessed by road vehicles.

The jetty was constructed of both hewn hexagonal stones and natural uncut stones. The remaining jetty measures 12 m in width, 40 m in length, and 1.2 m in depth at the front. It has a gradual slope and was built in accordance with the surrounding topography and water levels.

영문 해설 내용

2021(김포)

갑곶나루는 경기도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오가던 나루이다. ‘갑곶(甲串)’이라는 이름은 ‘갑옷으로 만든 곶’이라는 뜻이다. 고려 고종이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갈 때, 이곳이 해안과 거리가 좁고 수심도 얕아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원래 이 나루에는 제대로 된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 이곳에 귀양와 있던 박신(1362-1444)이 자신의 사재를 써서 석축로를 축조하였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로 피난하기 위해 이용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봉림대군이 외적의 침입을 막은 곳이라고 전해진다.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후 500년 동안 이용되던 갑곶나루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 무렵 김포 성동리와 강화 용정리에 새로운 나루터가 생기면서 폐쇄되었고,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개통되었다.

석축로는 잘 다듬은 육면체의 석재와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석축로의 규모는 폭 12m, 길이 40m, 앞면의 깊이 1.2m 규모이다. 지형을 활용하여 낮은 수심을 따라 축조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