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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남은 동학농민운동의 자취
이야기
광주 지역의 동학농민운동은 전국적 혁명 흐름 속에서 호남의 저항 정신과 공동체 의식이 집약된 사건이었다. 오늘날 광주 곳곳에는 그 기억과 흔적이 남아 있다.
광주 남구 이장동에는 후손들이 주도해 조성한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있다. 이곳은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후손인 고광문(高光文, 1860~1898)·고광인(高光寅, 1862~1936)·고광룡(高光龍, 1867~1938) 3형제가 살던 곳으로, 이들은 가문의 의병 전통을 이어받아 동학군에 참여했다. 고광문은 자신의 재산을 바쳐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봉기에 나섰으며, 형제인 고광인과 고광룡도 농민들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의 대열에 참여했다. 이후 고광문의 증손이 부지를 기증하면서, 이곳은 동학농민군의 희생과 정신을 기리는 기념공간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광주 도심에는 동학농민 집강소터가 있었다. 현재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부지 일대로 추정되는 이곳은 당시 농민군의 행정 중심지이자 자치의 상징이었다. 또한 용진산 동학농민군 전투지에서는 1894년 11월 13일, 광주 동학군이 나주 수성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한편 너릿재 일대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잡혀서 처형되었던 곳으로 전한다.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은 예술을 통해서도 계승되었다. 소설가 송기숙은 『녹두장군』에서 봉기의 이념과 농민의 현실을 생생히 그려냈고, 화가 하성흡은 수묵화 《역사의 다리》(1994)를 통해 혁명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재해석했다. 또한 구전 설화 「이장태 이야기」에는 이춘영이 황룡강 전투에서 ‘닭장태’를 휘두르며 싸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광주의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지역 봉기가 아니라, 저항과 자치, 그리고 연대의 정신을 품은 역사적 출발점이었다. 오늘날 광주가 민주와 인권의 도시로 기억되는 뿌리에는, 바로 이 시기의 ‘광주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