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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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이름 | 4.19혁명 |
|---|---|
| 한자명 | 四一九革命 |
| 영문명 | April 19 Revolution |
| 이칭 | 4월 혁명, 4·19 의거, 4월혁명 |
| 발생시기(기간) | 1960년 3월~4월 |
| 발생지역 | 전국 |
| 주요 인물/단체/기관 | 학생과 시민, 이승만 정부 등 |
정의 및 개요
- 4.19혁명은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독재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항쟁이다.
특징
-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거 및 투표를 조작하였다.
-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광주, 마산을 시작으로 확대되었으며 특히, 4월 11일에 김주열의 시체가 최루탄이 머리에 박힌 채 발견되자 시위는 전국적으로 거세졌다.
-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에 새로 헌법이 제정되고, 8월에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 광주 4.19혁명은 자유당의 독재정권과 3.15부정선거에 항거한, 광주에서 발생한 시위이다. 당시 광주에서는 3월 15일 낮 12시 40분경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 민주당 선거 참관인이 철수하며 선거 포기 선언을 하고, 당원과 시민·학생들이 “민주주의는 죽었다”며 곡(哭)민주주의 장송 시위를 벌이다 진압 경찰과 충돌했다. 이로부터 세 시간 뒤 마산에서 1차 시위가 발생했고, 마산 앞바다에서 행방불명된 김주열 학생이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발견되자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 광주에서는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이 최초로 들고 일어나 광주 시내 각 학교에 전파함으로써 광주 4.19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불어난 시위대는 시내 곳곳의 파출소와 소방서를 파괴하며 경찰과 충돌했고, 광주에서의 시위는 이후 목포, 여수, 순천 등 전남 일대로 퍼져나갔다.
- 광주 4.19혁명 당시 광주에서는 8명(경찰 1명)의 사망자와 5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의미관계망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4·19혁명 (四一九革命)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902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4.19혁명 | 3.15부정선거 | 4.19혁명의 원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