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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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이름 | 들불야학 |
|---|---|
| 설립자 | 박기순 |
| 출범/해체시기 | 1978년~1981년 |
정의 및 개요
출범 배경(계기)
-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많은 대학생이 노동 야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 전태일이 생전에 누군가 함께 노동법을 공부하고 함께 투쟁할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에 공감한 대학생들이 하나둘 야학을 만들어갔다.
- 박기순은 그 전에 산수동의 꼬두메야학(1977)에서 10개월 정도 활동한 적이 있었으나 이곳은 검정고시 준비를 위주로 하는 야학이었다.
- 박기순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1978년 6월) 때 시위를 주도하다가 전남대학교에서 강제 제적을 당하였는데, 그 후 서울에 있는 겨레터야학을 알게 되면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 광주로 돌아온 박기순은 광천공단의 자동차 하청업체에 위장 취업하는 한편, 서울 겨레터야학을 본받아 광주에서도 최초의 노동 야햑인 들불야학을 만들었다. 들불이라는 이름도 박기순이 직접 지었다.
- 유현종의 장편소설인『들불』(1972~1974년 집필됨)에서 따온 이름으로, 소설에서는 들불처럼 전국에 번져가는 동학농민운동을 표현한 말이었다.
활동 및 사건
- 초기에는 서울 '겨레터야학'에서 활동하던 광주 출신의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 등이 동참하였다.
-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23일 처음 문을 열었는데, 약 35명의 공단 노동자들이 학생으로 들어왔다.
- 준비과정에서 장소를 찾지 못해 고심했었으나 가톨릭농민회와 조비오 신부님이 광천동성당 관계자를 연결해주어, 광천동성당의 교리학습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 마침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광주에 내려온 윤상원을 설득하여 합류시키게 되고, 신영일, 나상진, 전용호, 박관현, 박효선 등도 차차 동참하였다.
- 들불야학에서는 '선생님-학생'이라는 호칭 대신 '강학-학강'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교육을 지향한 것이다. 이곳은 검정고시 준비와 함께 노동자들의 의식 고취 및 노동조합결성을 목표로 교육하였다.
- 들불야학의 창시자 박기순은 1978년 12월에 연탄가스로 갑자기 사망하였고, 이후 들불야학의 리더는 윤상원이 맡게 되었다.
- 1979년 1월부터는 야학 장소를 광천시민아파트 다동 2층으로 옮겨서 교육을 이어갔다.
- 특히 5.18민주화운동 기간에는 윤상원 등 들불야학에 속한 열사들이 민중 저항 언론물인 투사회보를 제작 및 배포하여 당시 철저히 고립된 광주의 상황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 들불야학 활동가 중에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3명이 사망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투옥되거나 고문당하여 대부분 건강하고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하였다.
- 들불야학은 1981년에 중지되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참고자료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들불야학 | 박기순 | 창시자 | ||
| 들불야학 | 광천동성당 | 초기 야학 장소 | ||
| 들불야학 | 전태일 | 대학생들의 야학 활동에 큰 계기가 됨 | ||
| 들불야학 | 광천시민아파트 | 1979년 1월 이후 야학 장소 | ||
| 들불야학 | 윤상원 | 박기순의 권유로 동참 | ||
| 들불야학 | 박관현 | 윤상원의 권유로 동참 | ||
| 들불야학 | 5.18민주화운동 | 야학 활동가들이 투쟁에 적극 참여 | ||
| 들불야학 | 투사회보 |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야학 활동가들이 만든 저항언론물 | ||
| 들불야학 | 들불7열사 | 들불기념사업회에서 지정한 열사 7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