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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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6887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7월 11일 (월) 09: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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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들불야학의 창시자이며 ‘우리의 교육지표’사건(1978) 때 가두시위를 주도했던 시민노동운동가이다. 1957년 전남 보성 출생. 보성여중과 광주 전남여고를 거쳐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현 역사교육과)에 입학하였다(76학번). 박정희 군사독재 정부의 대표적인 학생운동탄압사건인 민청학련 사건(1974)의 주역이었던 박형선의 동생이다. 박기순이 3학년이던 1978년 6월 전남대 교수 11인은 박정희 정부의 ‘국민교육헌장’에 반발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하고 다음날 전원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대되면서 박기순은 가두시위를 주동적으로 이끌었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이후 당시 광주시의 유일한 공단 지역이었던 광천동에서 자동차 하청업체에 위장취업하여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또한 서울에 있던 ‘겨레터 야학’을 본받아 강사들을 섭외하고 광천동에 노동자들을 위한 들불야학을 설립한다. 광천동성당 교리학습실을 빌려서 운영했으며 “배우면서 가르치고,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취지로 교육의 의미를 새로 정립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서울에서 귀향한 윤상원에게도 야학 활동을 권유하여 합류시키게 된다. 1978년 12월 24일 광천동성당 크리스마스 행사에 야학팀들이 참여하여 전남대 출신 작가 박효선이 만든 연극 ‘우리들을 보라’를 단체 공연하였다. 공연 후에는 팀원들과 함께 윤상원의 집 광천시민아파트에 가서 뒤풀이 행사를 열었다. 성탄절인 다음날, 야학의 난방에 필요한 땔감을 구하기 위해 야학에서 약 3km 떨어진 광주시 화정동 소년원 뒤편 야산까지 가서 장작을 모았다. 일을 마치고 며칠 만에 부모님 댁(광주시 주월동)에 간 박기순은 다음날 새벽 본인의 방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22세의 젊고 열정적인 운동가를 쓰러뜨린 사인은 허망하게도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1978.12.27. 박기순 영결식에서는 황석영, 문병란이 조사를 낭독하고 가수 김민기가 ‘상록수’를 불렀다. 1982.2.20. 올케 윤경자의 제안으로 성사된 윤상원과의 영혼결혼식이 망월동 묘역에서 열렸다. 두 달 후 당시 광주의 문화운동 관련자들이 모여 만든 음악극 ‘넋풀이 굿‘(빛의 결혼식)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된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원작. 황석영 작사, 김종률 곡)이 전국적으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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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 Actor 인물 박기순(1957~1978) 박기순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박기순

※ 참고: Ontology:EKC_광주:Class

Contextu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들불야학 박기순 창설
박형선 박기순 오빠
윤상원 박기순 영혼결혼식
임을 위한 행진곡 박기순 헌정곡
※ 참고: Ontology:EKC_광주:R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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