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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양방죽|경양방죽]]은 1968년 매립될 때까지 광주시 동구 계림동 일대에 있었던 인공 호수이다. 조선 세종 시기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방]]이 3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편이지만, 통일신라 말기에 [[남원 부인]] (견훤의 어머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 등 다른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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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릿재|너릿재]]광주시 동구 선교동(지원동 관할)과 전남 화순군 화순읍을 잇는 약 2Km의 고갯길이다. 오르고 내리는 길은 경사가 급하지만 고갯 마루는 널찍하고 평평해서 한자로는 조선 초기부터 [[판치]]라고 표기했었다.
*주변 논밭에 필요한 농업 용수를 확보하고, 홍수를 예방하기 위한 수리 시설이었으며, 현재 광주 서구 풍암동에 있는 [[풍암저수지]] 와 비슷한 크기였다고 한다. 호수안에는 작은 섬이 2개 있었고, 주변은 버드나무, 팽나무, 억새 등 다양한 나무들이 숲길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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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바로 옆에 구 [[너릿재 터널]] (1971~)과 신 너릿재 터널(2007~)이 개통된 후에는 차량 통행이 제한되어, 현재는 산책로로 사용되고 있다.
*무려 500년이 넘게 광주를 아름다운 호수 마을로 만들어주었던 경양방죽은 일제강점기에 약 3분의 2가 사라졌다(1차 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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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도둑도 많고 비극적인 사고가 많아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이름이었다. 언행이 고약한 사람에게 "칼 들고 너릿재나 갈 놈"이라고 욕하기도 하였다.
*1935년부터 당시 전남 지사였던 [[야지마 스기조]] 를 중심으로, 호수를 매립하여 일본인 거주지역을 만들려는 계획이 세워졌고, [[최흥종]] 목사가 주축이 된 [['경양방죽 매립 반대 투쟁위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8~1939년에 호수의 약 70%가 매립지로 변하였다. 호수 북쪽에 있던 산을 허물어 그 흙으로 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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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잡혀서 처형되었던 곳이라고 하며, 경술국치를 목전에 둔 1907년에는 [[양회일]] 의병장이 관군에게 희생된 곳이다. 또한, 1946년 8월 15일 새벽 3시 경, 광주로 향하던 [[화순 탄광]]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미군정 경찰들에게 학살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광복 1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광주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완전독립'과 '쌀 배급 증량' 등을 외치던 중 공격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작아진 경양방죽은 해방과 6.25전쟁 이후 무섭게 늘어나는 도시 인구 때문에 점차 쓰레기가 넘쳐 나는 고인 물이 되어갔고, 1968년 광주시가 추진한 광주 시가지 정비 및 확장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졌다(2차 매립). 그 자리에 [[구_광주시청]] (1969~2004)(현 홈플러스광주계림점)이 들어섰고, 도로와 주택지가 만들어졌다. 이 2차 매립때 바로 [[광주_태봉산]]을 허물어 생긴 흙을 사용했고, 매립지를 매각하여 생긴 수익은 [[금남로]] 를 8차선으로 확장하는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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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중에 북한군과 남한군이 대결하면서 서로 번갈아가며 상대방 측이라 생각되는 민간인들을 죽인 곳도 너릿재였다.
*효율을 앞세운 근대화와 도시 행정은 넓어진 도로와 택지를 얻은 대신 수백 년 동안 광주를 지켰던 광주_태봉산과 경양방죽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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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1980)때도 비극은 너릿재를 비켜가지 않았다. 5월 22일 공수부대는 너릿재를 지나던 버스를 총격하여 승객 30여 명이 죽음을 당했는데, 그때 버스에서 유일한 생존자는 여고생 1명( [[홍금숙]]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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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 죽은 자들의 관(널)들이 수없이 지났던 고개여서 널재(너릿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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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가족들, 연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아름다운 산책로이며 특히 벚꽃이 만개하는 봄에 축제가 열리기도 하는 등 비극의 흔적은 단지 고개 이름에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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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2일 (월) 16:40 판

Definition

  • 너릿재는 광주시 동구 선교동(지원동 관할)과 전남 화순군 화순읍을 잇는 약 2Km의 고갯길이다. 오르고 내리는 길은 경사가 급하지만 고갯 마루는 널찍하고 평평해서 한자로는 조선 초기부터 판치라고 표기했었다.
  • 고개 바로 옆에 구 너릿재 터널 (1971~)과 신 너릿재 터널(2007~)이 개통된 후에는 차량 통행이 제한되어, 현재는 산책로로 사용되고 있다.
  • 옛날부터 도둑도 많고 비극적인 사고가 많아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이름이었다. 언행이 고약한 사람에게 "칼 들고 너릿재나 갈 놈"이라고 욕하기도 하였다.
  • 1895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잡혀서 처형되었던 곳이라고 하며, 경술국치를 목전에 둔 1907년에는 양회일 의병장이 관군에게 희생된 곳이다. 또한, 1946년 8월 15일 새벽 3시 경, 광주로 향하던 화순 탄광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미군정 경찰들에게 학살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광복 1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광주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완전독립'과 '쌀 배급 증량' 등을 외치던 중 공격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 1950년 6.25전쟁 중에 북한군과 남한군이 대결하면서 서로 번갈아가며 상대방 측이라 생각되는 민간인들을 죽인 곳도 너릿재였다.
  • 5.18민주화운동 (1980)때도 비극은 너릿재를 비켜가지 않았다. 5월 22일 공수부대는 너릿재를 지나던 버스를 총격하여 승객 30여 명이 죽음을 당했는데, 그때 버스에서 유일한 생존자는 여고생 1명( 홍금숙 )이었다.
  •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 죽은 자들의 관(널)들이 수없이 지났던 고개여서 널재(너릿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질 정도였다.
  • 현재는 가족들, 연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아름다운 산책로이며 특히 벚꽃이 만개하는 봄에 축제가 열리기도 하는 등 비극의 흔적은 단지 고개 이름에만 남아 있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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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릿재 Place 자연 고개 너릿재 너릿재 Neo-lic Hill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너릿재

Contextu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경양방죽 계림동 위치
경양방죽 김방 조선 세종 때 경양방죽을 만들었다는 전라도 관찰사
정약용 경호 鏡湖 거울처럼 아름다운 호수라는 경양방죽의 별명
경양방죽 정약용 경양방죽에 대한 시를 씀
경양방죽 경양의_못가를_지나며 경양방죽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시(1779)
경양방죽 태봉산 2차 매립을 위해 허물었던 산
경양방죽 금남로 매립지 매각 수익으로 확장된 도로
경양방죽 구_광주시청 매립지에 세워진 관공서
경양방죽 최흥종 1차 매립때 반대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1937~1939)
경양방죽 경양방죽매립반대투쟁위원회 최흥종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매립 반대 모임
경양방죽 광주시가지정리계획 1968년 광주_태봉산과 경양방죽을 없애고 도로, 택지 등을 만든 도시 계획
경양방죽 광여도 경양방죽이 표기된 지도(1800년경)
경양방죽 해동지도 경양방죽이 표기된 지도(1750년대 초)
경양방죽 경양역 고려~조선말기 광주읍성 서쪽에 있던 역(호수 이름의 유래)
경양방죽 추억이_깃든_경양마을_만들기_사업 계림1동 주민들이 추진하는 사업
경양방죽 신무기원2600년기념사업 일본이 1935~1940년 시기에 추진한 일본 건국 기념 사업. 경양방죽 매립도 포함.
경양방죽 황성신문 경양방죽의 축조 시기에 대한 전설 게재된 신문(1902)
경양방죽 광주군사 光州郡史 경양방죽 김방 축조설의 뒷받침이 된 책(1933)

Spatial Data

id 위도 경도 고도 주소
경양방죽 35.161430 126.916509 광주광역시 동구 무등로 314



Web Resource

type resource title description url
해설 위키백과 경양방죽 https://ko.wikipedia.org/wiki/경양방죽
해설 인문360 사이트 경양방죽(2019-11-14, 김지원) 그 산과 호수가 정말 거기 있었을까?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382.do?mode=view&cid=2366000
해설 광주역사문화자원 스토리텔링 경양방죽 http://gjstory.or.kr/sub.html?pid=121
참고 광주드림 [광주갈피갈피] 경양방죽이 간직한 비밀(2016-06-21, 조광철 학예연구사-현재 광주역사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473895
참고 광주드림 [광주갈피갈피] 경양방죽, 역사와 추억도 함께 파묻히고(2020-07-21, 조광철)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01266
참고 광주일보 1930년대 물길 덮어 도로, 주거지로..개발에 묻힌 '물의 도시'(2012-05-16, 윤현석 기자) www.kwangju.co.kr/article.php?aid=1337094000467949188
참고 광주일보 경양방죽의 추억(2020-03-30, 박석무 교수) www.kwangju.co.kr/article.php?aid=1585494000692428078
참고 뉴스포털1 광주이야기-경양방죽(2015-06-05, 정의행 단장) http://www.civilreport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43
참고 광주광역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경양방죽이야기1~3(2014-06-23,07-10,10-10, 윤희철 부장) http://greengj21.or.kr/contents/board/default/view.php?top_menu=board&menu=10&sub_menu=&bbs_uid=4575
동영상 광주MBC 남도는 깊다:김방#경양방죽(2014-07-09) https://www.youtube.com/watch?v=WkJNafcR0As
동영상 지역N문화 경양방죽에 얽힌 설화(2021-02-04) https://www.nculture.org/ton/localToonDetail.do?contentId=11025

Bibliography

type bibliographic_index online_resource url
단행본 박선홍, 『광주 1백년』1, 개화기 이후 광주의 삶과 풍속,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 심미안, 2012. Riss http://www.riss.kr/link?id=M13024305
단행본 정운채, 조광철, 정기진, 주인택, 김형주, 김지현, 『光州 : 사진으로 만나는 도시 光州의 어제와 오늘 』, 광주시립박물관, 2007. Riss http://www.riss.kr/link?id=M11195880
단행본 변동명, 김희태, 이옥희, 배재훈, 조상현, 『 광주 역사와 함께 한 경양방죽 그리고 태봉산』, 전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20-02-28. Riss http://www.riss.kr/link?id=M1559936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