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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림숲|유림숲]]은 광주읍성의 북문 쪽(충장로 5가와 광주일고 인근)에서 현재의 누문동, 유동, 임동을 거쳐 무등경기장 정문 쪽까지 이어져 있던 울창한 숲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인공숲으로 추측되며, 300여 년간 광주를 숲의 고장으로 지켜왔으나 1968년에 시가지 정비 계획이 추진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태봉산, | + | * [[유림숲|유림숲]]은 광주읍성의 북문 쪽(충장로 5가와 광주일고 인근)에서 현재의 누문동, 유동, 임동을 거쳐 [[무등경기장]] 정문 쪽까지 이어져 있던 울창한 숲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인공숲으로 추측되며, 300여 년간 광주를 숲의 고장으로 지켜왔으나 1968년에 시가지 정비 계획이 추진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태봉산]] , [[경양방죽]] 과 같은 시기에 없어졌다. |
*조선은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둑을 쌓은 후 거기에 숲을 만들었는데, 유림숲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숲들은 수해를 방지하는 기능과 함께 바람도 막아주고 전시에는 수비를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까지 해주었다. 광주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이 숲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광주에서 행여나 좋은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유림숲이 막아준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숲의 이름처럼 버드나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의 종류도 80여 종으로 차차 다양해지고 규모도 울창해졌다. | *조선은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둑을 쌓은 후 거기에 숲을 만들었는데, 유림숲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숲들은 수해를 방지하는 기능과 함께 바람도 막아주고 전시에는 수비를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까지 해주었다. 광주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이 숲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광주에서 행여나 좋은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유림숲이 막아준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숲의 이름처럼 버드나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의 종류도 80여 종으로 차차 다양해지고 규모도 울창해졌다. | ||
*옛날에는 광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갈때 이 길을 거쳐 장성을 지나 상경하였고, 반대로 한양에서 광주읍성으로 들어올때는 반드시 이 숲 길을 지나야 했다. 광주에 부임한 지방 수령들은 여기에서 사슴, 꿩, 호랑이 등을 사냥하기도 했는데, 입을 모아 유림숲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 *옛날에는 광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갈때 이 길을 거쳐 장성을 지나 상경하였고, 반대로 한양에서 광주읍성으로 들어올때는 반드시 이 숲 길을 지나야 했다. 광주에 부임한 지방 수령들은 여기에서 사슴, 꿩, 호랑이 등을 사냥하기도 했는데, 입을 모아 유림숲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 ||
− | *유림숲이 사라진 자리에는 도로, 병원, 학교, 공장시설, 주택가 등이 들어섰고, 현재는 유동, 임동 등 동네 이름에서만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 | *유림숲이 사라진 자리에는 도로, 병원, 학교, 공장시설, 주택가 등이 들어섰고, 현재는 [[유동]], [[임동]] 등 동네 이름에서만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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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0일 (토) 16:02 판
Definition
- 유림숲은 광주읍성의 북문 쪽(충장로 5가와 광주일고 인근)에서 현재의 누문동, 유동, 임동을 거쳐 무등경기장 정문 쪽까지 이어져 있던 울창한 숲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인공숲으로 추측되며, 300여 년간 광주를 숲의 고장으로 지켜왔으나 1968년에 시가지 정비 계획이 추진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태봉산 , 경양방죽 과 같은 시기에 없어졌다.
- 조선은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둑을 쌓은 후 거기에 숲을 만들었는데, 유림숲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숲들은 수해를 방지하는 기능과 함께 바람도 막아주고 전시에는 수비를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까지 해주었다. 광주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이 숲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광주에서 행여나 좋은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유림숲이 막아준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숲의 이름처럼 버드나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의 종류도 80여 종으로 차차 다양해지고 규모도 울창해졌다.
- 옛날에는 광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갈때 이 길을 거쳐 장성을 지나 상경하였고, 반대로 한양에서 광주읍성으로 들어올때는 반드시 이 숲 길을 지나야 했다. 광주에 부임한 지방 수령들은 여기에서 사슴, 꿩, 호랑이 등을 사냥하기도 했는데, 입을 모아 유림숲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 유림숲이 사라진 자리에는 도로, 병원, 학교, 공장시설, 주택가 등이 들어섰고, 현재는 유동, 임동 등 동네 이름에서만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id | class | groupName | partName | label | hangeul | hanja | english | infoUrl | iconUr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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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_태봉산 | Place | 자연 | 산 | 광주_태봉산(胎峰山) ) | 광주_태봉산 | 光州胎峰山 | Gwangju_Taebong Mt. |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광주_태봉산 |
Contextual Relations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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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_태봉산 | 태봉산_유래비 | 산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안내석 | |
광주_태봉산 | 신안동 | 위치 | |
광주_태봉산 | 이괄의_난 | 관련 사건 | |
광주_태봉산 | 용성대군 | 태의 주인 | |
용성대군 | 인조 | 아들-아버지 | |
용성대군 | 인열왕후 | 아들-어머니 | |
광주_태봉산 | 태실 | 1928년에 발견됨 | |
광주_태봉산 | 태항아리 | 1928년에 발견됨 | |
광주_태봉산 | 광주시가지계획 | 1939년 수립된 계획(태봉산 허무는 계획 포함) | |
광주_태봉산 | 광주시가지정리계획 | 1967~1969년에 태봉산을 허문 도시 계획 | |
광주_태봉산 | 광주지도(1872) | 태봉산 기록이 있는 지도 | |
광주_태봉산 | 태실비 | 원래 태봉산 꼭대기에 세워져 있던 목제 비 | |
광주_태봉산 | 야마모토_데스타로 | 1930년대에 태봉산에 대한 기록을 책으로 씀 | |
광주_태봉산 | 광주군사 (光州郡史) | 야마모토 데스타로가 쓴 책 | |
광주_태봉산 | 조선호남지 | 1935년에 쓰여진 책(태봉산 관련 한시 기술) | |
광주_태봉산 | 호남문화연구 |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가 발행(태봉산 관련 한시 기술) | |
광주_태봉산 | 경양방죽 | 산을 허물어 저수지를 메꿈 | |
광주_태봉산 | 광주역사민속박물관 | 야외에 태실 전시 | |
광주_태봉산 | 국립광주박물관 | 태항아리, 태지석 소장 | |
광주_태봉산 | 매일신보 | 1928년 태봉산에서 발견된 유물에 대한 기사 게재 | |
광주_태봉산 | 선원록 | 태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왕실 족보 |
Spatial Data
id | 위도 | 경도 | 고도 | 주소 |
---|---|---|---|---|
광주_태봉산 | 35.165054 | 126.904997 |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121 |
Web Resource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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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조상현, 「광주 태봉산 전설의 재구성」, 『호남학』,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2019. | Kiss | https://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691100 |
단행본 | 변동명,김희태,이옥희,배재훈,조상현,『(광주 역사와 함께 한) 경양방죽 그리고 태봉산 』,전남대학교 출판문화원, 2020. | 국립중앙도서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