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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__NOTOC__ = '''고경명의 무등산 여행기: 누정의 풍류로 유람을 마무리하다''' = == 이야기 == 고경명은 무등산 유람의 마지막 여정을 담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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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 이야기 ==
고경명은 무등산 유람의 마지막 여정을 담양의 소쇄원에서 마무리하였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조영한 별서로,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대표적 누정 공간이었다. 시냇물이 담장을 뚫고 들어와 뜰을 감돌고, 조담이라 불린 작은 폭포 아래로 맑은 물소리가 구슬처럼 울려 퍼졌다. 노송과 죽림,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은 김인후가 남긴 「소쇄원48영」의 시구처럼 청수하고 담박하였다. 이날 양산보의 후손 양자정이 고경명을 위해 간소한 연회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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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당시 [[광주목사]]이던 [[임훈|임훈(林薰, 1500~1584)]] 일행과 함께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 동안 [[무등산]] 일대를 유람했다. 『[[유서석록|유서석록(遊瑞石錄)]]』은 이 다섯 날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으로, 23~24일에는 [[담양_소쇄원|소쇄원]]과 [[담양_식영정_일원|식영정]], [[광주_환벽당_일원|환벽당]]을 중심으로 누정의 풍류로 유람을 마무리한 장면을 전한다.
  
밤이 되어 그는 식영정에 들렀다. 식영정은 김성원이 창건한 정자로, 임억령과 고경명, 김성원, 송순이 교유한 식영정사선의 중심이었다. 정자와 서하당에는 박공의 글씨가 걸려 있었고, 이곳에서 임억령이 남긴 「식영정이십영」과 「식영정팔십영」이 전해졌다. 고경명은 서하당에서 일행과 시를 짓고 술을 나누며 풍류를 즐겼고, 환벽당과 제월당, 광풍각 등 인근의 누정들과 이어지는 학문과 교유의 전통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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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적벽]] 일대를 지나온 일행은 [[담양_소쇄원|소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담양_소쇄원|소쇄원]]은 [[양산보|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영한 별서로,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대표적 누정이었다. 시냇물이 담장을 뚫고 뜰을 감돌며 조담이라 불린 폭포 아래로 흘러내렸고, 노송과 대숲,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은 [[김인후|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소쇄원48영|소쇄원48영(瀟灑園四十八詠)]]」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이날 [[양산보]]의 아들 [[양자정|양자정(梁子渟, 1527~1597)]]이 [[임훈]]과 [[고경명]] 일행을 위해 간소한 연회를 마련하였다.
  
24일 아침, 창평현령 이효가 찾아와 서하당에서 연회를 열었다. 이만인이 뒤늦게 합류해 술잔을 기울였고, 고경명은 식영정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시회를 열었다. 만취한 그는 소나무 아래에 누워 잠시 잠들었고, 깨어나 무등산의 푸른 봉우리를 바라보며 유람의 끝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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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김성원|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임억령(林億齡, 1496~1568)]]을 위해 창건한 [[담양_식영정_일원|식영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성원]]은 이번 무등산 유람의 일행 중 한 사람으로, 식영정 인근에 자신의 호를 따서 당호 [[서하당]]을 지었다. [[고경명]]은 이곳에서 일행과 시를 짓고 술을 나누며 풍류를 즐겼고, [[광주_환벽당_일원|환벽당]], [[제월당]], [[광풍각]] 등 인근 누정과 이어지는 교유의 전통을 되새겼다.
  
이번 여정의 기록은 『유서석록』의 마지막 장면으로, 고경명이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 등 누정 공간에서 풍류와 교유로 산행을 마무리한 하루를 담고 있다. 산중의 여정이 자연의 경관을 좇는 길이었다면, 이 날은 인문적 교류와 예의의 세계 속에서 유람을 완성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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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아침에는 창평현령이 찾아와 [[서하당]]에서 연회를 열고 시회가 이어졌으며, 이후 식영정으로 자리를 옮겨 풍류를 나누었다. [[고경명]]은 만취한 채 소나무 아래에서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나 [[무등산]]의 푸른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유서석록]]』은 이를 유람의 마지막 장면으로 기록하며, 산행이 누정의 교유와 풍류 속에서 마무리되었음을 전한다.
  
 
== 스토리 그래프 ==
 
== 스토리 그래프 ==

2025년 11월 6일 (목) 00:21 기준 최신판


고경명의 무등산 여행기: 누정의 풍류로 유람을 마무리하다

이야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당시 광주목사이던 임훈(林薰, 1500~1584) 일행과 함께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 동안 무등산 일대를 유람했다. 『유서석록(遊瑞石錄)』은 이 다섯 날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으로, 23~24일에는 소쇄원식영정, 환벽당을 중심으로 누정의 풍류로 유람을 마무리한 장면을 전한다.

화순 적벽 일대를 지나온 일행은 소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쇄원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영한 별서로,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대표적 누정이었다. 시냇물이 담장을 뚫고 뜰을 감돌며 조담이라 불린 폭포 아래로 흘러내렸고, 노송과 대숲,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은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소쇄원48영(瀟灑園四十八詠)」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이날 양산보의 아들 양자정(梁子渟, 1527~1597)임훈고경명 일행을 위해 간소한 연회를 마련하였다.

밤에는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을 위해 창건한 식영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성원은 이번 무등산 유람의 일행 중 한 사람으로, 식영정 인근에 자신의 호를 따서 당호 서하당을 지었다. 고경명은 이곳에서 일행과 시를 짓고 술을 나누며 풍류를 즐겼고, 환벽당, 제월당, 광풍각 등 인근 누정과 이어지는 교유의 전통을 되새겼다.

24일 아침에는 창평현령이 찾아와 서하당에서 연회를 열고 시회가 이어졌으며, 이후 식영정으로 자리를 옮겨 풍류를 나누었다. 고경명은 만취한 채 소나무 아래에서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나 무등산의 푸른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유서석록』은 이를 유람의 마지막 장면으로 기록하며, 산행이 누정의 교유와 풍류 속에서 마무리되었음을 전한다.

스토리 그래프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