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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18일 (토) 16:05 판
이름 난 정자의 현판 크리에이터, 서화가 윤용구
이야기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광주의 여러 정자와 사당을 통해 특별해 보이는 한 사람의 글씨가 남아있다. 바로 서화가 윤용구이다. 그는 이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문신이자, 글씨와 그림으로 이름을 떨친 예인이었다.
그의 붓 끝은 단정하면서도 기개가 있었다. 초은정의 현판에 새겨진 글씨는 유학자의 고결한 정신을 담았고, 칠송정과 용호재의 현판에는 남도의 풍류와 절의가 깃들었다. 광주 수곡동에 있던 귀후재의 현판 또한 그의 작품으로, 고봉 기대승의 후손 기언복이 세운 재실에 윤용구의 서체가 걸리면서 학문과 예술의 조화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의 손길은 정자뿐 아니라 사당과 서당에도 이어졌다. 병천사의 제액, 하은정의 ‘기장산하(氣壯山河)’ 현판, 만취정의 글씨 모두 윤용구의 필적이다. 정자마다 다른 주인과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이름을 세상에 드러낸 것은 그의 붓이었다.
윤용구의 글씨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건물의 정신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창작이었다. 그는 현판의 크리에이터로서, 광주의 풍경 속 수많은 정자에 자신만의 예술적 흔적을 남겼다. 지금도 그의 서체가 남은 정자에 들어서면, 붓 끝에 서린 선비의 기상과 예술혼이 바람처럼 스며드는 듯하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