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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洪範圖, 1868~1943)는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명령으로 약 17만 명의 고려인이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이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로 옮겨와 유랑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비극은 끝없는 철길 위의 강제이주열차로 상징되며, 화가 문빅토르는 이를 《1937_강제이주열차》로 남겼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는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명령으로 약 17만 명의 고려인이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이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로 옮겨와 유랑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비극은 끝없는 철길 위의 강제이주열차로 상징되며, 화가 문빅토르는 이를 《1937_강제이주열차》로 남겼다.
  
[[광주_고려인마을|광주 고려인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홍범도공원이 있다. 예전 다모아어린이공원이던 이곳에는 홍범도 흉상이 세워져, 그가 걸어온 길을 조용히 전한다. 미술 작품 《홍범도 장군》 역시 문빅토르의 붓끝에서 부활했고, 고려인마을극단1937은 연극 《홍범도》로 그의 생애를 무대 위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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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동 고려인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홍범도공원이 있다. 예전 다모아어린이공원이던 이곳에는 홍범도 흉상이 세워져, 그가 걸어온 길을 조용히 전한다. 미술 작품 《홍범도 장군》 역시 문빅토르의 붓끝에서 부활했고, 고려인마을극단1937은 연극 《홍범도》로 그의 생애를 무대 위에 옮겼다.  
  
 
홍범도의 삶은 단지 독립군 장군의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강제 이주라는 민족사의 비극과 맞닿아 있으며, 그 흔적은 광주 고려인마을의 거리와 무대, 그리고 공원 한편의 흉상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오늘날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와 연극은, 그가 남긴 용기와 연대의 정신을 후세에 잇는 또 다른 ‘전선’이 되고 있다.
 
홍범도의 삶은 단지 독립군 장군의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강제 이주라는 민족사의 비극과 맞닿아 있으며, 그 흔적은 광주 고려인마을의 거리와 무대, 그리고 공원 한편의 흉상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오늘날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와 연극은, 그가 남긴 용기와 연대의 정신을 후세에 잇는 또 다른 ‘전선’이 되고 있다.

2025년 9월 26일 (금) 21:26 기준 최신판

고려인 사회의 지도자, 홍범도 장군

이야기

홍범도(洪範圖, 1868~1943)는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명령으로 약 17만 명의 고려인이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이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로 옮겨와 유랑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비극은 끝없는 철길 위의 강제이주열차로 상징되며, 화가 문빅토르는 이를 《1937_강제이주열차》로 남겼다.

월곡동 고려인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홍범도공원이 있다. 예전 다모아어린이공원이던 이곳에는 홍범도 흉상이 세워져, 그가 걸어온 길을 조용히 전한다. 미술 작품 《홍범도 장군》 역시 문빅토르의 붓끝에서 부활했고, 고려인마을극단1937은 연극 《홍범도》로 그의 생애를 무대 위에 옮겼다.

홍범도의 삶은 단지 독립군 장군의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강제 이주라는 민족사의 비극과 맞닿아 있으며, 그 흔적은 광주 고려인마을의 거리와 무대, 그리고 공원 한편의 흉상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오늘날 이곳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와 연극은, 그가 남긴 용기와 연대의 정신을 후세에 잇는 또 다른 ‘전선’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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