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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당시 [[호남신학대학교]] 4학년이었던 [[문용동]]은 5월 18일 자신이 전도사로 일하던 상무대교회에 다녀오다가 시민들이 [[계엄군]]의 몽둥이에 쓰러지고, 노인마저 군홧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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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엄사령부는 진압 뒤인 1980년 5월 31일 발표한 ‘광주사태의 전모’를 통해 “계엄군은 26일 밤 시내에 은밀히 폭도로 가장, 침투시켰던 요원과 매수했던 부화뇌동자로 하여금 도청 내 폭약, 폭발장치 뇌관을 빼어 못 쓰게 만들고 총기를 작동하지 못하도록 공작하는 과정에서 1명 피살, 1명 중상의 귀중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내 성공시켰다”라고 발표했다. ‘매수했던 부화뇌동자’는 [[문용동]]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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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엄사령부는 진압 뒤인 1980년 5월 31일 발표한 ‘광주사태의 전모’를 통해 “[[계엄군]]은 26일 밤 시내에 은밀히 폭도로 가장, 침투시켰던 요원과 매수했던 부화뇌동자로 하여금 도청 내 폭약, 폭발장치 뇌관을 빼어 못 쓰게 만들고 총기를 작동하지 못하도록 공작하는 과정에서 1명 피살, 1명 중상의 귀중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내 성공시켰다”라고 발표했다. ‘매수했던 부화뇌동자’는 [[문용동]]을 지칭한다. 이 일을 두고 진상 규명 과정에서 [[문용동]]이 일부러 뇌관 분리를 핑계로 군인을 불러와 [[계엄군]]이 쉽게 [[옛 전남도청|전남도청]]을 접수할 수 있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였다.
이 일을 두고 진상 규명 과정에서 [[문용동]]이 일부러 뇌관 분리를 핑계로 군인을 불러와 계엄군이 쉽게 전라남도청을 접수할 수 있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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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문용동]]은 [[옛 전남도청|전남도청]]에 계속 남아 있다가 5월 27일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으며, 시민의 안전을 위한 충정에서 뇌관 분리에 앞장선 것으로 밝혀져 오해가 풀리고 ‘광주를 구한 의인’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 그러나 [[문용동]]은 전남도청에 계속 남아 있다가 5월 27일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으며, 시민의 안전을 위한 충정에서 뇌관 분리에 앞장선 것으로 밝혀져 오해가 풀리고 ‘광주를 구한 의인’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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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지 번호는 2-3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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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호남신학대학교]]에서는 [[문용동]]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고, 이듬해 교정에 순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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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3일 (토) 06:48 판

문용동

기본 정보

이름 문용동
영문명 Moon Yongdong
생몰년도 1952년~1980년
성별 남성
국적 대한민국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





정의 및 개요

  •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하면서 전남도청 지하실에 있던 TNT 폭약의 뇌관 분리에 앞장섰으며, 5월 27일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민주화 유공자.


주요 활동/업적/저서/작품 등

  • 1980년 당시 호남신학대학교 4학년이었던 문용동은 5월 18일 자신이 전도사로 일하던 상무대교회에 다녀오다가 시민들이 계엄군의 몽둥이에 쓰러지고, 노인마저 군홧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 계엄군광주 시내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난 뒤 문용동전남도청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전남도청 지하실에 있는 회수된 TNT 폭약과 수류탄 등 무기를 관리하였다.
  • 문용동은 이러한 무기들이 자칫 광주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것을 우려해 뇌관 분리를 결심하였다. 하지만 시민군 중에는 폭약 전문가가 없어 문용동상무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군인 한 명이 와서 분리하였다.
  • 계엄사령부는 진압 뒤인 1980년 5월 31일 발표한 ‘광주사태의 전모’를 통해 “계엄군은 26일 밤 시내에 은밀히 폭도로 가장, 침투시켰던 요원과 매수했던 부화뇌동자로 하여금 도청 내 폭약, 폭발장치 뇌관을 빼어 못 쓰게 만들고 총기를 작동하지 못하도록 공작하는 과정에서 1명 피살, 1명 중상의 귀중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내 성공시켰다”라고 발표했다. ‘매수했던 부화뇌동자’는 문용동을 지칭한다. 이 일을 두고 진상 규명 과정에서 문용동이 일부러 뇌관 분리를 핑계로 군인을 불러와 계엄군이 쉽게 전남도청을 접수할 수 있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였다.
  • 그러나 문용동전남도청에 계속 남아 있다가 5월 27일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으며, 시민의 안전을 위한 충정에서 뇌관 분리에 앞장선 것으로 밝혀져 오해가 풀리고 ‘광주를 구한 의인’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인간관계

  • 시민군_폭약관리반은 5월23일 결성됐다. 문용동, 김영복(26·택시운전사), 양홍범(20·권투선수), 박선재(22·송원전문대 휴학생), 정남균(21), 이혁(19·인천교대 학생), 이경식(23·조선대 학생), 강남열, 정곤석(20·고교 중퇴) 등 9명이 참여했다.


지역/사건/단체 내 역할 또는 영향력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참고자료

Type Resource Title/Index URL
웹리소스 디지털광주문화대전 문용동 https://gwangju.grandculture.net/gwangju/toc/GC60002224
웹리소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문용동 http://www.518.org
웹리소스 한겨레 전남도청 지하실 폭약 해체한 문용동 전도사는 계엄군 프락치였나 (2017-12-19, 정대하 기자)?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24252.html
웹리소스 오마이뉴스 '광주를 구한 의인' 문용동 전도사를 아십니까?(2020-05-13, 조호진 기자)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640641
간행물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신학연구소 ‘5‧18정신과 타자를 위한 인간 ―문용동과 본회퍼의 생애를 중심으로. 고재길. 『신학과 선교』, 2019, 57권 57호.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606484843

Contextu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Remark(Note)
문용동 호남신학대학교 문용동은 호남신학대학교 재학생이었다.
문용동 시민군_폭약관리반 문용동은 시민군_폭약관리반에서 활동하였다.
문용동 5.18_민주묘지 문용동은 5.18_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문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문용동을 순직자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