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동 왕자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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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광주 [[용봉동|용봉마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왕자대]](王子臺)에 관한 두 가지의 지명설화.
 
* 과거 광주 [[용봉동|용봉마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왕자대]](王子臺)에 관한 두 가지의 지명설화.
* [[용봉동_왕자대|용봉동 왕자대]]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진다. 하나는 [[태조_왕건|태조 왕건]]이 즉위한 자리라서 [[왕자대]]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조_왕건|왕건]]이 [[견훤]]군과 싸웠던 장소라서 [[왕자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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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봉동_왕자대|용봉동 왕자대]]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진다. 하나는 [[왕건|태조 왕건]]이 즉위한 자리라서 [[왕자대]]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건]]이 [[견훤]]군과 싸웠던 장소라서 [[왕자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는 저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왕자대]]와 [[왕조대]](王祖臺)를 구별해 설명하고 있다. [[왕자대]]는 신라의 [[신무왕]](神武王)이 [[장보고]](張保臯)에게 의지하며 반정을 도모한 곳이며, [[태조_왕건|왕건]]이 뜻을 세운 곳은 [[왕조대]]라는 것이다. [[김정호]]에 따르면 [[왕자대]]는 [[신무왕]], [[왕조대]]는 [[태조_왕건|태조 왕건]]의 유적이다. [[태조_왕건|왕건]]은 왕이 되었음에도 본디 왕자가 아니었고, [[신무왕]]은 본디 경주의 왕족이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왕자대]]의 위치나 유래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역사적 기록과 현장의 구전자료로 보아, 학계에서는 [[김정호]]의 『[[대동지지]]』 속 [[왕자대]]와 [[왕자대]]가 뒤바뀌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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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는 저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왕자대]]와 [[왕조대]](王祖臺)를 구별해 설명하고 있다. [[왕자대]]는 신라의 [[신무왕]](神武王)이 [[장보고]](張保臯)에게 의지하며 반정을 도모한 곳이고, [[왕건]]이 뜻을 세운 곳은 [[왕조대]]라는 것이다. [[김정호]]에 따르면 [[왕자대]]는 [[신무왕]], [[왕조대]]는 [[왕건|태조 왕건]]의 유적이다. [[왕건]]은 왕이 되었음에도 본디 왕자가 아니었고, [[신무왕]]은 본디 경주의 왕족이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왕자대]]의 위치나 유래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역사적 기록과 현장의 구전자료로 보아, 학계에서는 [[김정호]]의 『[[대동지지]]』 속 [[왕자대]]와 [[왕자대]]가 뒤바뀌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 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출간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 [[왕자산]]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위치가 마곡면 용동리로 표기되어 있다.
 
* 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출간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 [[왕자산]]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위치가 마곡면 용동리로 표기되어 있다.
* 「[[용봉동_왕자대|용봉동 왕자대]]」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에 의한 지명유래'이다. [[태조_왕건|왕건]]과 [[견훤]]이 나주의 노안면과 광주의 [[동곡동|동곡면]](용봉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광산구 [[동곡동]]) 사이의 지역에서 싸웠다는 구전설화는 주로 배를 이용했던 [[태조_왕건|왕건]]이 노안과 [[동곡동|동곡]] 사이의 강변에서 활동했을 것이라는 예측을 뒷받침한다. <ref> [http://www.grandculture.net/gwangju/search/GC60004548?keyword=%EC%9A%A9%EB%B4%89%EB%8F%99%20%EC%99%95%EC%9E%90%EB%8C%80&page=1 「용봉동 왕자대」, 디지털광주문화대전]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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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봉동_왕자대|용봉동 왕자대]]」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에 의한 지명유래'이다. [[왕건]]과 [[견훤]]이 나주의 노안면과 광주의 동곡면(용봉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광산구 동곡동) 사이의 지역에서 싸웠다는 구전설화는 주로 배를 이용했던 [[왕건]]이 노안과 [[동곡]] 사이의 강변에서 활동했을 것이라는 예측을 뒷받침한다. <ref> [http://www.grandculture.net/gwangju/search/GC60004548?keyword=%EC%9A%A9%EB%B4%89%EB%8F%99%20%EC%99%95%EC%9E%90%EB%8C%80&page=1 「용봉동 왕자대」, 디지털광주문화대전] </ref>
  
 
== Semantic Data ==
 
== Semantic Data ==

2024년 2월 23일 (금) 06:00 판

Definition

  • 과거 광주 용봉마을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왕자대(王子臺)에 관한 두 가지의 지명설화.
  • 용봉동 왕자대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진다. 하나는 태조 왕건이 즉위한 자리라서 왕자대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건견훤군과 싸웠던 장소라서 왕자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는 저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왕자대왕조대(王祖臺)를 구별해 설명하고 있다. 왕자대는 신라의 신무왕(神武王)이 장보고(張保臯)에게 의지하며 반정을 도모한 곳이고, 왕건이 뜻을 세운 곳은 왕조대라는 것이다. 김정호에 따르면 왕자대신무왕, 왕조대태조 왕건의 유적이다. 왕건은 왕이 되었음에도 본디 왕자가 아니었고, 신무왕은 본디 경주의 왕족이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왕자대의 위치나 유래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역사적 기록과 현장의 구전자료로 보아, 학계에서는 김정호의 『대동지지』 속 왕자대왕자대가 뒤바뀌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 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출간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서 왕자산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위치가 마곡면 용동리로 표기되어 있다.
  • 용봉동 왕자대」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에 의한 지명유래'이다. 왕건견훤이 나주의 노안면과 광주의 동곡면(용봉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광산구 동곡동) 사이의 지역에서 싸웠다는 구전설화는 주로 배를 이용했던 왕건이 노안과 동곡 사이의 강변에서 활동했을 것이라는 예측을 뒷받침한다. [1]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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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동_왕자대 Work 구비문학 설화 설화) 용봉동 왕자대 용봉동 왕자대 龍峯洞王子臺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용봉동_왕자대

http://dh.aks.ac.kr/~gwangju/wiki/images/icon/2023/용봉동_왕자대.jpg

Contextu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note
용봉동_왕자대 왕자대 용봉동 왕자대는 용봉동에 위치한 왕자대에 관한 설화이다
용봉동_왕자대 용봉동 용봉동 왕자대는 용봉동에 위치한다
용봉동_왕자대 견훤 용봉동 왕자대는 견훤과 관련이 있다
용봉동_왕자대 태조_왕건 용봉동 왕자대는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다
태조_왕건 동곡동 태조 왕건은 동곡면(오늘날의 동곡동)에서 전투했다
동곡동 용봉리 동곡동은 과거 용봉리를 포함한다
용봉동_왕자대 동곡동 용봉동 왕자대는 동곡동과 관련이 있다
왕자대 왕조대 왕자대는 왕조대와 관련이 있다
용봉동_왕자대 (설화가 정확히 이해되지 않아 관계를 더 추가하지 못했습니다. 자료가 보강되면 추가하겠습니다.)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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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디지털광주문화대전 「용봉동 왕자대」 http://aks.ai/GC60004548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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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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