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2024-C260"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박광옥과 관련된 광주의 문화유산) |
(→박광옥과 관련된 광주의 문화유산) |
||
| 12번째 줄: | 12번째 줄: | ||
문헌 전승의 측면에서는 『[[회재유집|회재유집(懷齋遺集)]]』과 [[회재유집목판]]이 핵심적이다. 이들 자료는 [[벽진서원]]을 통해 보존·전승되며, [[박광]]옥의 사상과 글을 후대에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또한 [[서창한옥문화관]]은 ‘[[서창한옥문화관_박광옥실|박광옥실]]’을 운영하고 서창문화기행을 통해 지역 인물을 현대적으로 해석·소개하는 문화 플랫폼의 기능을 수행한다. | 문헌 전승의 측면에서는 『[[회재유집|회재유집(懷齋遺集)]]』과 [[회재유집목판]]이 핵심적이다. 이들 자료는 [[벽진서원]]을 통해 보존·전승되며, [[박광]]옥의 사상과 글을 후대에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또한 [[서창한옥문화관]]은 ‘[[서창한옥문화관_박광옥실|박광옥실]]’을 운영하고 서창문화기행을 통해 지역 인물을 현대적으로 해석·소개하는 문화 플랫폼의 기능을 수행한다. | ||
| − | + | 이러한 유적과 기록물, 지명은 박광옥의 학문과 의병 활동, 그리고 지역사회에 남긴 발자취를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 |
2025년 12월 26일 (금) 15:02 판
박광옥과 관련된 광주의 문화유산
이야기
박광옥(朴光玉)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호남 의병의 일원으로, 광주 지역의 여러 문화유산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광주향교는 박광옥이 직접 중수에 관여한 공간으로, 지방 유학 교육과 향촌 질서의 재정비라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는 그가 행정가이자 유학자로서 지역 사회의 제도와 교육을 함께 책임졌음을 보여준다. 벽진서원은 박광옥을 배향한 서원으로, 제향과 학문 계승이라는 상징적 기능을 통해 그의 학덕을 기리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한편 개산방죽과 수월당은 박광옥이 지역 기반 시설과 생활 공간의 조성에 직접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개산방죽은 수리·농업 기반을 마련한 실천의 흔적이며, 수월당은 현재 전평제근린공원 안에 자리 잡아 역사 경관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헌 전승의 측면에서는 『회재유집(懷齋遺集)』과 회재유집목판이 핵심적이다. 이들 자료는 벽진서원을 통해 보존·전승되며, 박광옥의 사상과 글을 후대에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또한 서창한옥문화관은 ‘박광옥실’을 운영하고 서창문화기행을 통해 지역 인물을 현대적으로 해석·소개하는 문화 플랫폼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유적과 기록물, 지명은 박광옥의 학문과 의병 활동, 그리고 지역사회에 남긴 발자취를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는 개산방죽(전평호수)과 수월당을 건립하였으며, 두 유적 모두 현재 전평제근린공원 내에 위치한다. 광주향교를 중수하였고, 『회재유집(懷齋遺集)』과 그 안의 「희경루전목사류후태호명경심(喜慶樓餞牧使柳侯太浩)」을 남겼다. 희경루에는 이 작품이 새겨져 있다. 사후에는 벽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서원과 인근 의열사가 역사적 공간을 이룬다. 현대에는 서창한옥문화관 내에 박광옥실이 마련되어 그의 이름을 기리고, 회재로 역시 그의 호에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유적과 기록물, 지명은 박광옥의 학문과 의병 활동, 그리고 지역사회에 남긴 발자취를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