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광주문화예술인문스토리플랫폼
이동: 둘러보기, 검색
(문서를 비움)
(태그: 비우기)
1번째 줄: 1번째 줄:
 +
__NOTOC__
 +
<!-- ETB_KEY_SEPARATOR -->
 +
<div class="hide-txt">김적</div>
 +
{{기본정보테이블
 +
|이름=김적
 +
|한자명=⾦適
 +
|영문명=
 +
|이칭=희정(希正)(자), 취암(鷲巖)(호)
 +
|생몰년도=1507년~1579년
 +
|성별=남성
 +
|국적=
 +
|출생지=
 +
|위도(latitude)=
 +
|경도(longitude)=
 +
|InfoURL=https://public.aks.ac.kr/~gwangju/wiki/index.php/김적
 +
|iconURL=https://dh.aks.ac.kr/~metaArchive/gwangju/2024/김적.jpg
 +
}}
  
 +
== 정의 및 개요 ==
 +
* [[김적]]은 조선 중기 명종 때에 [[광주목사]]를 지냈다. 그 외에도 성균관 학유, 승문원 부정자, 김제군수, 고성군수를 지냈다.
 +
 +
== 특징 ==
 +
* [[김적]]의 부친은 승사랑 전 흥양훈도 김수남이다. 무안 몽탄에 거주하며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김충수(⾦忠秀, 1538~?), 김효수(⾦孝秀), 김덕수(⾦德秀), 김재수(⾦載秀), 김진수(⾦振秀)이다.
 +
 +
== 이력 ==
 +
{{#tag:html| <pre class="etb-pre-container">1537년: 진사가 됨.
 +
1543년: 식년시 문과 병과 19위로 급제함.
 +
1546년: 성균관 학유로 재직 중 과거 시험지 위조 혐의로 승문원 부정자 신여읍과 함께 국문을 받음.
 +
1555년 (을묘왜변): 김제군수로 재직하며 전라도도순찰사 이준경의 중군이 되어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움.
 +
고성군수 시절: 유신현감으로 있을 때 권세가에 곡식을 보내고 백성들에게 못을 메워 논을 만들게 하여 권세가에게 주는 등 민폐를 끼쳤다는 이유로  이로 인해 간원(諫院)으로부터 탄핵을 받음. 선조는 그의 수령 임명을 허락하지 않음.</pre> }}
 +
 +
== 의미관계망 ==
 +
{{SemanticGraph  | key=김적}}
 +
 +
== 참고자료 ==
 +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
! style="width:15%" | Type || style="width:20%" | Resource || style="width:35%" | Title/Index || style="width:30%" | URL
 +
|-
 +
| 웹리소스 || 한국학호남진흥원 || 광주선생안 - 무진주도독에서 광주광역시장까지(상) || https://www.hiks.or.kr/Translations/2/read/102
 +
|}
 +
 +
== Contextual Relations ==
 +
{| class="wikitable" style="width:100%"
 +
! style="width:15%" | Source || style="width:15%" | Target || style="width:20%" | Relation || style="width:25%" | Attribute || style="width:25%" | Remark(Note)
 +
|-
 +
| 김적 || 광주목사 ||  ||  || 김적은 광주목사를 지냈다
 +
|-
 +
| 김적 || 김수남 ||  ||  || 김적의 부친은 김수남이다
 +
|}
 +
 +
[[분류:문맥항목]] [[분류:Agent]] [[분류:Agent/2024]] [[분류:Person]] [[분류:Person/2024]] [[분류:김정원]]

2025년 9월 24일 (수) 08:08 판

김적

기본 정보

이름 김적
한자명 ⾦適
이칭 희정(希正)(자), 취암(鷲巖)(호)
생몰년도 1507년~1579년
성별 남성





정의 및 개요

  • 김적은 조선 중기 명종 때에 광주목사를 지냈다. 그 외에도 성균관 학유, 승문원 부정자, 김제군수, 고성군수를 지냈다.

특징

  • 김적의 부친은 승사랑 전 흥양훈도 김수남이다. 무안 몽탄에 거주하며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김충수(⾦忠秀, 1538~?), 김효수(⾦孝秀), 김덕수(⾦德秀), 김재수(⾦載秀), 김진수(⾦振秀)이다.

이력

1537년: 진사가 됨.
1543년: 식년시 문과 병과 19위로 급제함.
1546년: 성균관 학유로 재직 중 과거 시험지 위조 혐의로 승문원 부정자 신여읍과 함께 국문을 받음.
1555년 (을묘왜변): 김제군수로 재직하며 전라도도순찰사 이준경의 중군이 되어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움.
고성군수 시절: 유신현감으로 있을 때 권세가에 곡식을 보내고 백성들에게 못을 메워 논을 만들게 하여 권세가에게 주는 등 민폐를 끼쳤다는 이유로  이로 인해 간원(諫院)으로부터 탄핵을 받음. 선조는 그의 수령 임명을 허락하지 않음.

의미관계망



참고자료

Type Resource Title/Index URL
웹리소스 한국학호남진흥원 광주선생안 - 무진주도독에서 광주광역시장까지(상) https://www.hiks.or.kr/Translations/2/read/102

Contextu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Remark(Note)
김적 광주목사 김적은 광주목사를 지냈다
김적 김수남 김적의 부친은 김수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