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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대한제국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으로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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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독립선언|2.8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대한제국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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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부른다.
 
* 1918년 12월 15일 「한국인, 독립을 주장」이라는 재미동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기사와, 12월 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에 유학생들은 대한제국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 1918년 12월 15일 「한국인, 독립을 주장」이라는 재미동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기사와, 12월 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에 유학생들은 대한제국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 재일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어 “지금이 우리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라며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 백관수(白寬洙), 이종근(李琮根), 송계백(宋繼白), 김도연(金度演)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그 후 전영택(田榮澤)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이광수(李光洙), 김철수(金喆壽)가 추가되어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354 한국학중앙연구원, 2·8독립선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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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어 “지금이 우리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라며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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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행위원으로 최팔용, 백관수, 이종근, 송계백, 김도연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그 후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이광수, 김철수가 추가되어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354 한국학중앙연구원, 2·8독립선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 실행위원 최팔용, 김희술은 1919년 2월 7일 밤 「민족대회소집 청원서」 1천부와 「독립선언서」 600부를 작성하여, 2월 8일 10시 준비된 청원서와 선언서를 우편으로 일본정부, 각국 대사관, 일본 귀족원 및 중의원, 조선총독부 및 각 신문사로 보냈다.
 
* 실행위원 최팔용, 김희술은 1919년 2월 7일 밤 「민족대회소집 청원서」 1천부와 「독립선언서」 600부를 작성하여, 2월 8일 10시 준비된 청원서와 선언서를 우편으로 일본정부, 각국 대사관, 일본 귀족원 및 중의원, 조선총독부 및 각 신문사로 보냈다.
* 이날 오후 2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600여명의 환호 속에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유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하였으나, 관할 니시간다 경찰서장의 강제해산 명령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실행위원 10명이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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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오후 2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600여명의 환호 속에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유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하였으나 관할 니시간다 경찰서장의 강제해산 명령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실행위원 10명이 붙잡혔다.
* 송계백과 최근우(崔謹愚)에 의해 완성된 선언서 초안 한 부가 현상윤(玄相允),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최린(崔麟) 등 국내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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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계백과 최근우에 의해 완성된 선언서 초안 한 부가 현상윤, 송진우, [[최남선]], 최린 등 국내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 참조: http://aks.ai/GC60002185
 
* 참조: http://aks.ai/GC60002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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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0일 (화) 18:00 기준 최신판

Definition

  • 2.8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대한제국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부른다.
  • 1918년 12월 15일 「한국인, 독립을 주장」이라는 재미동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기사와, 12월 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에 유학생들은 대한제국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 재일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어 “지금이 우리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라며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 실행위원으로 최팔용, 백관수, 이종근, 송계백, 김도연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그 후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이광수, 김철수가 추가되어 11명의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1]
  • 실행위원 최팔용, 김희술은 1919년 2월 7일 밤 「민족대회소집 청원서」 1천부와 「독립선언서」 600부를 작성하여, 2월 8일 10시 준비된 청원서와 선언서를 우편으로 일본정부, 각국 대사관, 일본 귀족원 및 중의원, 조선총독부 및 각 신문사로 보냈다.
  • 이날 오후 2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600여명의 환호 속에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유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하였으나 관할 니시간다 경찰서장의 강제해산 명령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실행위원 10명이 붙잡혔다.
  • 송계백과 최근우에 의해 완성된 선언서 초안 한 부가 현상윤, 송진우, 최남선, 최린 등 국내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 참조: http://aks.ai/GC60002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