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행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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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은 시민군 본부가 있는 [[옛 전남도청]]에 진입하기 위해 화정동 쪽에서 들어와 농성동 [[구_전라남도_농촌진흥원|전라남도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였다. | *1980년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은 시민군 본부가 있는 [[옛 전남도청]]에 진입하기 위해 화정동 쪽에서 들어와 농성동 [[구_전라남도_농촌진흥원|전라남도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였다. | ||
− | *이 소식을 듣고 [[홍남순]] 변호사, [[이기홍]] 변호사, [[김성용]] 신부, [[이성학]] 장로, [[조비오]] 신부 등 17명의 수습위원이 회의를 했다. [[김성용]] 신부는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자"라고 말했다. 이들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따르면서 긴 행렬이 이어졌다. | + | *이 소식을 듣고 [[홍남순]] 변호사, [[이기홍]] 변호사, [[김성용]] 신부, [[이성학]] 장로, [[조비오]] 신부 등 17명의 수습위원이 긴급 회의를 했다. [[김성용]] 신부는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자"라고 말했다. 이들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따르면서 긴 행렬이 이어졌다. |
*오전 8시경 [[농성광장]]에 도착한 수습위원들은 탱크를 막아서며 군인들에게 군대를 후퇴시킬 것을 요청했고,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위기는 일단 넘겼다. 수습위원들은 [[상무대]] 전교사로 가서 4시간 30분 동안 계엄군 측과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되었다. | *오전 8시경 [[농성광장]]에 도착한 수습위원들은 탱크를 막아서며 군인들에게 군대를 후퇴시킬 것을 요청했고,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위기는 일단 넘겼다. 수습위원들은 [[상무대]] 전교사로 가서 4시간 30분 동안 계엄군 측과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되었다. | ||
*다음 날인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몰고 [[옛_전남도청|옛 전남도청]]에 진입해 마지막 남은 [[윤상원]] 열사 등 16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면서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 *다음 날인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몰고 [[옛_전남도청|옛 전남도청]]에 진입해 마지막 남은 [[윤상원]] 열사 등 16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면서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 ||
− | * | + | *[[농성광장]]에 [[죽음의_행진|죽음의 행진]] 현장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참조: https://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40020 | *참조: https://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400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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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4일 (일) 01:20 기준 최신판
Definition
- 죽음의 행진: 5.18민주화운동 막바지인 1980년 5월 26일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 위원 17명이 맨몸으로 계엄군의 탱크를 막아 광주 진입을 저지시킨 사건.
- 1980년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은 시민군 본부가 있는 옛 전남도청에 진입하기 위해 화정동 쪽에서 들어와 농성동 전라남도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였다.
- 이 소식을 듣고 홍남순 변호사, 이기홍 변호사, 김성용 신부, 이성학 장로, 조비오 신부 등 17명의 수습위원이 긴급 회의를 했다. 김성용 신부는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자"라고 말했다. 이들이 앞장서고 시민들이 따르면서 긴 행렬이 이어졌다.
- 오전 8시경 농성광장에 도착한 수습위원들은 탱크를 막아서며 군인들에게 군대를 후퇴시킬 것을 요청했고,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위기는 일단 넘겼다. 수습위원들은 상무대 전교사로 가서 4시간 30분 동안 계엄군 측과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되었다.
- 다음 날인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몰고 옛 전남도청에 진입해 마지막 남은 윤상원 열사 등 16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면서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 농성광장에 죽음의 행진 현장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 참조: https://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4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