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태봉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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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일제강점기에 수립된 [[광주 시가지 계획]] (1939년)때부터 헐릴 예정이었고, 1967~1969년에 [[광주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산을 허물고 그 흙을 [[경양방죽]] 을 메우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 때 태봉산과 경양방죽이 함께 없어진 것이다. |
− | + | *[[태봉]]이라는 이름은 옛날부터 왕실의 태를 묻은 곳이라는 의미였다. | |
− | * | + | *[[광주_태봉산]]에 묻힌 태의 주인은 1928년 7월에 우연히 드러났다. 그 해 여름, 광주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우제를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가뭄의 원인을 태봉산에서 찾으려 하였다. 산 사람의 태를 묻어야 하는 태봉산에, 누군가 몰래 죽은 자의 무덤을 쓰면 그 마을에 가뭄과 같은 불행이 생긴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
− | * | + | *마을 사람들이 호미를 들고 몰려가서 산을 판 결과 무덤이 아닌, [[태실]] 과 그 관련 유물이 발견되었다. [[태지석]] 에 의하면 태의 주인은 1624년에 출생한 애기씨 대군(아기 대군)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그를 [[인조]] 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 (1624~1629)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
− | * | + | *태봉산과 관련된 전설에 의하면, 인조 2년에 발생한 [[이괄의 난]] (1624)으로 인조와 [[인열왕후]] 는 공주까지 피신해야 했는데, 난이 진압된 후에 용성대군이 태어났다. 그런데 왕자는 태어난 직후부터 유난히 병치레가 심했고, 이에 인열왕후는 아기를 위해 백일기도를 올렸다. 기도 중에 꾼 꿈 속에서 백발도사가 나타나 왕자의 태를 다른 곳, 즉 여의주 모양의 광주 고을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후는 원래 계룡산에 묻었던 왕자의 태를 [[광주_태봉산]] 으로 옮겼다. |
+ | *위의 전설이 만들어진 시기가 1928년의 '파묘 소동' 이전이었는지, 이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
+ | *태봉산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태봉산 유래비]] 만 남아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태실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에, 태항아리, 태지석 등 관련 유물은 [[국립광주박물관]] 에서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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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9일 (금) 15:15 판
Definition
- 광주_태봉산은 광주시 북구 신안동 121번지 일대에 있었던 산이다. 높이 약 50m, 면적 약 3천평 정도의 작은 산이며 들판에 그릇을 홀로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었다고 한다.
- 일제강점기에 수립된 광주 시가지 계획 (1939년)때부터 헐릴 예정이었고, 1967~1969년에 광주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산을 허물고 그 흙을 경양방죽 을 메우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 때 태봉산과 경양방죽이 함께 없어진 것이다.
- 태봉이라는 이름은 옛날부터 왕실의 태를 묻은 곳이라는 의미였다.
- 광주_태봉산에 묻힌 태의 주인은 1928년 7월에 우연히 드러났다. 그 해 여름, 광주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우제를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가뭄의 원인을 태봉산에서 찾으려 하였다. 산 사람의 태를 묻어야 하는 태봉산에, 누군가 몰래 죽은 자의 무덤을 쓰면 그 마을에 가뭄과 같은 불행이 생긴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 마을 사람들이 호미를 들고 몰려가서 산을 판 결과 무덤이 아닌, 태실 과 그 관련 유물이 발견되었다. 태지석 에 의하면 태의 주인은 1624년에 출생한 애기씨 대군(아기 대군)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그를 인조 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 (1624~1629)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 태봉산과 관련된 전설에 의하면, 인조 2년에 발생한 이괄의 난 (1624)으로 인조와 인열왕후 는 공주까지 피신해야 했는데, 난이 진압된 후에 용성대군이 태어났다. 그런데 왕자는 태어난 직후부터 유난히 병치레가 심했고, 이에 인열왕후는 아기를 위해 백일기도를 올렸다. 기도 중에 꾼 꿈 속에서 백발도사가 나타나 왕자의 태를 다른 곳, 즉 여의주 모양의 광주 고을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후는 원래 계룡산에 묻었던 왕자의 태를 광주_태봉산 으로 옮겼다.
- 위의 전설이 만들어진 시기가 1928년의 '파묘 소동' 이전이었는지, 이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태봉산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태봉산 유래비 만 남아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태실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에, 태항아리, 태지석 등 관련 유물은 국립광주박물관 에서 볼 수 있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id | class | groupName | partName | label | hangeul | hanja | english | infoUrl | iconUrl |
---|---|---|---|---|---|---|---|---|---|
광주_태봉산 | Place | 자연 | 산 | 광주_태봉산(胎峰山) ) | 광주_태봉산 | 光州胎峰山 | Gwangju_Taebong Mt. | http://dh.aks.ac.kr/~gwangju/wiki/index.php/광주_태봉산 |
Contextual Relations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
광주읍성유허 | 우왕 | 고려말 우왕시기에 처음 건축 | |
광주읍성유허 | 왜구 | 방어 위해 고려말에 축성 | |
광주읍성유허 | 광산동 | 위치 | |
광주읍성유허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 제 26호 | |
광주읍성유허 | 광주읍지 | 광주읍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1897) | |
광주읍성유허 | 세종실록지리지 | 광주읍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1454) | |
광주읍성유허 | 동국여지지 | 광주읍성 기록된 지리지(1656) | |
광주읍성유허 | 신증동국여지승람 | 광주읍성 기록된 지리지(1481~1530) | |
광주읍성유허 | 서원문 | 광주읍성의 동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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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읍성유허 | 진남문 | 광주읍성의 남문 | |
광주읍성유허 | 공북문 | 광주읍성의 북문 | |
광주읍성유허 | 남한폭도대토벌작전 | 일제 통감부가 의병 항쟁을 근절하려고 실시 | |
광주읍성유허 | 읍성철거령 | 일제가 1910년 추진 | |
광주읍성유허 | 해동지도 | 광주읍성을 보여주는 지도(18세기 중엽) | |
광주읍성유허 | 지방도(1871) | 광주읍성을 보여주는 지도 | |
광주읍성유허 | 광주읍성탐방가이드북 |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발간(2016) | |
광주읍성유허 | 절양루 | 광주읍성에 있던 누각(충장로5가 위치) | |
광주읍성유허 | 성벽처리위원회 | 통감부가 읍성 철거 위해 만듬(1907) | |
광주읍성유허 | 옛_전남도청 | 광주읍성 관아 자리 | |
광주읍성유허 | 희경루 | 광주읍성에 있던 누각(현 충장로우체국 위치). 2022년 중건 완성 예정 |
Spatial Data
id | 위도 | 경도 | 고도 | 주소 |
---|---|---|---|---|
광주읍성유허 | 35.146927 | 126.921208 |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2-2 |
Web Resource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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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황영산, 「광주읍성을 중심으로한 역사적 공간의 재현 연구」, 국내석사학위논문, 전남대교육대학원, 2015. | Riss | http://www.riss.kr/link?id=T137368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