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산
기본 정보
| 이름 | 태봉산 |
|---|---|
| 한자명 | 光州胎峰山 |
| 영문명 | Gwangju_Taebong Mt. |
| 위도(latitude) | 35.1650174 |
| 경도(longitude) | 126.9044281 |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일원(신안동 121) |
정의 및 개요
관련 행사 및 사건
- '태봉'이라는 이름은 옛날부터 왕실의 태를 묻은 곳을 의미했다. 태봉산에 묻힌 태의 주인은 1928년 7월에 우연히 드러났다.
- 그 해 여름, 광주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우제를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가뭄의 원인을 태봉산에서 찾으려 하였다. 산 사람의 태를 묻어야 하는 태봉산에, 누군가 몰래 죽은 자의 무덤을 쓰면 그 마을에 가뭄과 같은 불행이 생긴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호미를 들고 몰려가서 산을 판 결과 무덤이 아닌, 태실과 그 관련 유물이 발견되었다. 태지석에 의하면 태의 주인은 1624년에 출생한 애기씨 대군(아기대군)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그를 인조의 넷째 아들 용성대군(1624~1629)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 태봉산과 관련된 전설에 의하면, 인조 2년에 발생한 이괄의 난(1624)으로 인조와 인열왕후는 공주까지 피신해야 했는데, 난이 진압된 후에 용성대군이 태어났다. 그런데 왕자는 태어난 직후부터 유난히 병치레가 심했고, 이에 인열왕후는 아기를 위해 백일기도를 올렸다. 기도 중에 꾼 꿈속에서 백발도사가 나타나 왕자의 태를 다른 곳, 즉 '여의주 모양의 광주 고을'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후는 원래 계룡산에 묻었던 왕자의 태를 태봉산으로 옮겼다. 위의 전설이 만들어진 시기가 1928년의 '파묘 소동' 이전이었는지, 이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일제강점기에 수립된 광주시가지계획(1939년)때부터 헐릴 예정이었고, 1967~1969년에 광주시가지정비계획에 따라 산을 허물고 그 흙을 경양방죽을 메우는 용도로 사용했는데, 이때 태봉산과 경양방죽이 함께 없어졌다. 산이 있던 자리에는 도로와 광주역이 들어섰다.
그 외 정보
- 태봉산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태봉산 유래비만 남아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태봉산 태실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에, 태항아리, 태지석 등 관련 유물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지도
참고자료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태봉산 태실 | 용성대군 | isRelatedTo | 태의 주인 | |
| 용성대군 | 인조 | hasFather | 아들-아버지 | |
| 용성대군 | 인열왕후 | hasMother | 아들-어머니 | |
| 태봉산 태실 | 태봉산 | isRelatedTo | 1928년에 발견됨 | |
| 태봉산 | 광주군사 | isMentionedIn | 야마모토 데스타로가 쓴 책 | |
| 태봉산 | 경양방죽 | isRelatedTo | 산을 허물어 저수지를 메꿈 | |
| 태봉산 태실 | 광주역사민속박물관 | currentLocation | 야외에 태실 전시 | |
| 태봉산 | 매일신보 | isMentionedIn | 1928년 태봉산에서 발견된 유물에 대한 기사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