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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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빈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4일 (수) 10: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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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기획의도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 운동과 교육의 중요성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하고자 한다.

팀원

2023130036 김윤 2023131227 최용빈 2023131540 정혜나 2024130814 이민희 2024130911 신다정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교육기관 설립

민족 설립 교육기관

민족사학의 의미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로 정의한다.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개화교육구국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1]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

민족사학의 발전배경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들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50px-Quote-left.png 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50px-Quote-right.png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2]하였다.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대표적 민족사학 기관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의 지원 하에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나아가, 민족 주도로 설립된 두 학교가 모두 각각 고려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신채호(申采浩)

선교사 설립 교육기관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배재학당

배화학당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

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

안창호(安昌浩)

농촌 계몽 운동

농촌 계몽 운동은 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실시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대한자강회

군사 교육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

조선혁명간부학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3]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


한국 광복군의 모습
조선의용대 모습

한인소년병학교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산 넘어 아희들'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숭무학교(崇武學校)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독립군으로의 발전

데이터 시각화

마인드맵

교육구국운동 노드 마인드맵.png

온톨로지


콘텐츠 구조

클래스(Class)

클래스 내용 노드
인물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이동휘 안창호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기관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 신흥강습소
단체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신민회 협성회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지역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
활동_및_사건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

관계성(Relation)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

교육기관 지도

기타

각주

  1. 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
  2.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
  3.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