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화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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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

독립운동

1920년 3.1운동

배화학교의 학생 조직은 독립선언문을 미리 준비하여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려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체포를 염려한 교장은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고, 그날 오후 일본의 순경이 학교로 찾아오고 휴교령이 내려지며 무산되었다. 학생들은 1920년 3.1운동 일주기를 맞아 배화학당 내부에서 다시금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20년 3월 1일 새벽, 40여명의 여학생들이 학교 뒷산 필운대와 교정에서 만세를 외쳤고, 그중 24명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후에 6명이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출신인물

김명시

1924년 배화학당에 다니다 중퇴했고 1927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났다. 1928년 6월에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각국에서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는 민족과 중국인 운동가 300여명과 협의하여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주비회 조직하고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국내 광주학생 항일운동의 소식을 듣고 1930년 1~2월 만주 아성현해구로 가서 재만한인반일제국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어 출판계를 담당하며 <반일전선>을 제작하였다. 공산주의 선전잡지와 독립운동자금을 가지고 1932년 3월 30일 서울로 들어왔고 서울에서 잡지를 인쇄 및 배포하는 등 활동하다가 1932년 5월 신의주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9년 재차 중국으로 탈출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들어가 부녀복무대의 지휘관으로 적후 공작활동을 진행했다. 또한 일본점령지구인 텐진과 베이징등에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남궁억

1896년에 독립협회를 창립하였으며 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하였고 사장으로 임했으며, 1908년 애국계몽운동단체인 관동학회를 만들었다. 1910년 10월 배화학당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여러 가지 애국가사를 지어 보급하였다. 또한 한글서체를 새로 창안하여 알리기도 하였다. 1919년 민립대학 설립을 위해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모금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3.1운동 이후에 다시 시도되었다.1919년 9월 모곡학교를 설립한 뒤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을 조직,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다. 이후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차미리사

미국 유학 후 1917년 미국선교회에서 파견하는 선교사로 귀국하여 배화학교 교사와 사감으로 취임하였다. 여성의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1920년 1월에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배화학교 사감을 그만둔 후에도 예배당을 빌려 여자야학을 실시하며 여성들의 문맹퇴치와 계몽에 헌신하였다. 1921년 근화학원(덕성학원)을 만들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광복 후에도 여성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여 근화학원을 전신으로하는 덕성여자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출처